강력한 왕권 부활시켜 부국강병의 기틀 다져

⊙ 국정운영의 주체는 왕이다

[최양진 선생님의 철학으로 만나는 역사] 8. 구국(救國)의 해법을 법가에서 찾은 세조
조선의 네 번째 군주인 세종이 처음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이유는 태종대에 이룩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현명한 재상을 등용해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이 조화된 이상적 정치를 펼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왕권이 강력했고,세종 자신의 뛰어난 정치력이 있었기 때문에 왕권과 신권의 조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문종과 단종의 불안한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신권이 왕권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신권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6조 직계제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대에 실시된 의정부 서사제는 6조가 올린 사안 중에서 의정부의 1차 심사를 거친 사안들,즉 삼정승에 의해 1차적으로 검증을 받은 사안만을 왕에게 올리게 되는 제도다.

이에 따라 왕의 업무량은 감소했지만,의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세력은 그만큼 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에 세조에 의해 다시 부활된 6조 직계제란 6조의 판서(장관)가 왕에게 직접 업무보고 및 명령을 시달받는 제도다.

이 경우 의정부의 기능은 국가 주요사를 논의해 왕에게 '건의'하는 수준으로 전락하게 된다.

왜냐하면 6조는 실질적인 행정을 담당하는 부서였고,이러한 6조의 업무를 직접 왕에게 보고하고 왕에 의해 통제받으므로,의정부의 관료세력이 실무행정에 끼어들 여지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신권의 입지는 현저히 약해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즉 세조는 국가의 대소사에 관한 결정을 의정부 중심의 관료세력이 아닌 왕이 주체가 되는 6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 강화를 실현했다.

결국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이른바 패륜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계유정난을 일으킨 직접적인 이유도 김종서를 비롯한 대신들이 이른바 '황표정치'라 하여 나이 어린 단종을 왕으로 옹립해 놓고 나라의 정사를 신권에 의해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황표정치란 신하를 뽑을 때 세 정승이 노란색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사람을 뽑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그 결과 임금은 황표에 적힌 대로 승인만 해주는 형식적 위치에 놓여 왕권은 유명무실화하고 대신들이 나라의 실질적 운영하는 재상정치가 나타나게 되었다.

⊙ 유교의 차별적 형벌이 신권을 강화시켰다

초기 주(周)왕조의 봉건사회는 소위 국가사회의 범위가 좁은 만큼 그 조직이 비교적 간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예기'에서 말하고 있는 "예는 서민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형벌은 대부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규범의 실현이 가능했다.

중국 봉건사회의 핵심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적 유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나라의 천자와 제후,각 제후국의 대부들은 혈연을 매개로 한 친척 관계로 구성된 주종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천자가 다스리는 주나라의 중심적 통치권 내에 종속된 각국들은 사실상 통치권을 인정받는 반독립적 상태였으며 국내에도 많은 반독립 상태의 '집안(家)'들이 있었다.

따라서 형벌이라는 법의 적용에 있어서 귀족세력들에 대한 면책특권은 사실상 국가가 인정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유교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던 조선사회에서도 귀족계층에 대한 면책특권은 당연시되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왕권이 약해지고 신권이 강해지는 원인으로 작용했다.

⊙ 세조! 한비자와 동병상련을 느끼다

반면에 법가가 말하는 법은 오늘날의 형법이나 일반법과 같은 성격 외에 춘추전국이라고 하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부국강병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지녔다.

당시의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변법(變法)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 법가들의 이론과 주장을 종합하고 정리해 체계화시킨 이론가가 한비자다.

그렇다면 당시 한비자가 주장한 부국강병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한비자는 가장 시급한 문제로 모든 권신 대가의 행동이 반드시 국법에 합당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귀족세력의 면책특권을 국법에 근거해 제거함으로써 군주권을 강화시키는 일을 부국강병 실현의 일차 과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임금과 신하 간의 이해는 일치하는 경우보다 상충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한비자는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귀족세력에 대한 특권 제거의 필요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비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다음 글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임금의 이익은 재능 있는 사람이 관리가 되는 데 있고,신하의 이익은 무능한 사람이 특권을 잡는 데 있다.

임금의 이익은 공로 있는 사람이 벼슬을 얻는 데 있고,신하의 이익은 공로 없는 사람이 부귀해지는 데 있다.

임금의 이익은 호걸들이 그 재능을 다하는 데 있고,신하의 이익은 작당하여 사사로움을 취하는 데 있다.

이로써 나라의 땅은 하루하루 침점당하지만,사가는 날로 치부하게 되고,임금은 날로 빈약해지지만,대신은 하루하루 존귀해진다."

이처럼 한비자는 개인의 집안(私家)이 날로 부유해지는 것(私家富)과 대신이 하루하루 존귀해지는 것(大臣重)을 막기 위해서는 대신의 공이 크다고 해도 성내(城內)의 땅을 다 차지할 수 없게 하고,집안 사람들이 많다고 해도 사병(私兵)을 둘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 국법의 엄격한 적용이 불가피함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이 통치 수단으로서 법의 중요성을 무엇보다 중시하고 공평무사한 법의 집행을 강조한 한비자에게 있어서 궁극적 목적은 오직 왕권 강화를 통한 부국강병 실현에 있었다.

이런 점에서 6조 직계제를 통해 신권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시켜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했던 세조의 정치적 목표와 그 입장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 왕권 강화를 통하여 부국강병을 실현하다

세조는 중앙집권을 바탕으로 안정적 치세(治世)를 이끌어 나갔다.

관제 개편과 관리들의 기강 확립을 통해 중앙집권제를 확립하고 민생 안정책과 유화적인 외교활동을 통해 민간 생활의 편리를 꾀했으며,법전 편찬과 문화 사업으로 사회를 일신했다.

특히 세조의 많은 업적 가운데서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해 조선 왕조를 훌륭한 법전을 가진 법치 국가로 만든 것은 아주 뛰어난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계유정난을 통해 피의 역사를 기록한 후 왕위에 오른 세조였지만,정치에서는 자신을 왕에 추대한 정인지 신숙주 한명회 등을 중심세력으로 하여 왕권 강화를 바탕으로 세종대왕의 업적에 버금가는 훌륭한 치세(治世)를 이루어냈다.

⊙ 세조는 수주대토(守株待兎)의 과오를 범하지 않았다

"송(宋)나라에 한 농부가 있었다.

하루는 밭을 가는데 토끼 한 마리가 달려가더니 밭 가운데 있는 그루터기에 머리를 들이받고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것을 본 농부는 토끼가 또 그렇게 달려와서 죽을 줄 알고 밭 갈던 쟁기를 집어던지고 그루터기만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그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고사는 한비자(韓非)가 요순(堯舜)시대의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시대에 뒤떨어진 사상이라고 주장하며 그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했던 이야기다.

이는 곧 낡은 관습만을 고집하여 지키고,새로운 시대에 순응하지 못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한비자는 이전에 있었던 역사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서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대응책을 주장했다.

즉 세상이 달라지면 일도 달라지고,일이 달라지면 대비함도 바뀐다고 하는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취하여 무조건 옛날의 성인이나 선왕의 선례를 따를 수 없음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계유정난을 통한 세조의 왕위 등극을 한비자는 정당하게 보고 있는 것인가?

물론 유교적 명분이나 의리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조의 행위는 어린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패륜적인 행위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는데 다스림을 바꾸지 아니하면 어지러워진다'고 하는 철저한 상황 논리에 입각해 현실 문제를 이해하고 있던 한비자의 입장은 다르다.

신권을 제압하고 왕권 강화를 통해 세종 못지 않은 훌륭한 치세를 통해 민생을 안정시키고 조선 왕조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한 세조의 결단은 명분과 의리를 앞세운 낡은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라는 측면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서울 한성고 교사 cyj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