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여사, 재원…
[홍성호 기자의 '말짱 글짱'] 우리말에도 性이 있다 ①
"이회창 후보와 영부인,아니 이 후보의 부인을 청와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합시다."

1997년 7월21일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은 그 해 말 치러질 대통령 선거후보로 이회창씨를 뽑은 뒤 자축연을 열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이회창 대표의 경선대책위원장이었던 황낙주 전 국회의장은 이 대표의 부인 한인옥 여사를 영부인이라고 칭하면서 "전당대회 전날 꿈을 꾸었는데 푸른 바다에 7척의 배가 떠있었으나 이인제호 등 모든 배가 파도에 휩쓸려 침몰했고 이회창호만 순항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영부인 사건'이다.

언론들이 이를 놓칠 리 없다.

"후보의 부인을 미리 앞질러 '영부인'이라고 불렀다"며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당시 그가 '영부인'의 뜻을 정확히 알고 썼는지, 또는 의도적으로 쓴 것인지는 알 수 없어도 이 사건은 곧바로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권위주의적 말들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신문들도 덩달아 '李대표 부인에 영부인' '충성 경쟁의 압권' '신용비어천가' 등으로 규정,'영부인' 발언의 부적절함을 지적했다.

그런데 사실 이 '영부인(令夫人)'의 본래 뜻은 '남의 부인에 대한 높임말'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그래서 굳이 대통령의 부인을 가리킬 때뿐만 아니라 아무나 남의 아내를 높여 이를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남의 아들에게는 '영식(令息)'을,딸에게는 '영애(令愛)'라는 말을 쓴다.

문제는 당시까지만 해도 '영부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이 '대통령의 부인에게 쓰는 말' 정도로 박혀 있었다는 점이다.

요즘이야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많이 이뤄지고,게다가 말글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대통령 부인을 굳이 '영부인'이라 하지 않고 '○○○ 여사'라고 부르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게다가 많은 이들은 한자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단순히 대통령(大統領)의 領자에서 만들어진 말(領夫人)로 알고 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영부인'은 있지도 않지만 말이다.

이는 아마도 대통령을 '각하'로,그 부인을 '영부인'으로 부르던 권위주의 군사정권의 유물로 봐도 좋을 것이다.

한자어가 갖는 태생적 의미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 무심코 잘못 쓰기 쉬운 말에는 '재원(才媛)'이란 말도 있다.

'재원'의 사전적 풀이는 '뛰어난 능력이나 재주가 있는 젊은 여자'이다.

'○○○ 씨는 학식과 미모를 겸비한 재원이다'처럼 쓴다.

이때 '원(媛)'자는 女(계집 녀)변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미인,미녀'를 뜻한다.

爰은 '손톱 조(爪)+한 일(一)+벗 우(友)'로 만들어진 글자다.

즉 손으로 한 명의 벗을 끌어당긴다는 뜻으로 '당길 원'자이다.

따라서 여자(女)가 마음을 끌어당기는(爰) 게 '미인 원(媛)'이다.

재원(才媛)은 여기에 才(재주 재)가 붙어서 된 말이니 곧 '재주 있는 젊은 여자'를 뜻한다.

비슷한 말은 '재녀'이다.

그러니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다손 쳐도 남자는 결코 '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한자의 사용이 점차 줄어들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말의 의미자질이 '여자'임을 놓치는 경향이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남자를 가리키는,재원에 대응하는 말은 재자(才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