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상표권 분쟁에 휘말린 '어린왕자'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서점에서 사라졌다.

190여종에 이르는 번역본 가운데 대부분이 자취를 감추고 영한대역본 등 일부만 남아 있다.

영문도 모르고 서점을 찾은 독자들은 헛걸음만 하고 돌아선다.

매장 직원들도 속 시원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 채 "사정상 당분간 진열하지 않고 있다"며 어정쩡하게 양해를 구할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출판계 초유의 상표권 분쟁 때문이다.

'어린왕자'의 제호와 삽화 등을 국내에 상표 출원등록한 생텍쥐페리 상속재단 소젝스(SOGEX)가 국내 출판사들의 상표권 침해 문제를 제기하며 각 서점에 책 판매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소젝스의 한국 에이전트인 GLI컨설팅은 최근 인피니스라는 대행사를 통해 국내 출판사들이 망토 차림의 어린왕자 삽화 등 4종에 대한 상표권을 침해했다면서 더 이상 책을 유통시키지 말 것을 촉구하는 통고서를 보냈다.

이에 따라 대형 서점들은 혹시 발생할지도 모를 유통상의 분쟁 소지를 사전에 없애기 위해 해당 서적들을 일단 진열대에서 제외시켰다.

문제가 된 상표는 어린왕자가 초록색 망토 차림에 칼을 짚고 서 있는 어린왕자의 이미지,'르 프티 프랭스(Le Petit Prince)'라는 프랑스어 필기체 제호와 '어린왕자'라는 한글 서체,혹성에서 별을 바라보는 삽화 등 4종이다.

이들 상표권의 만료기간은 각각 2013, 2015, 2016년으로 지정돼 있다.

소젝스는 '어린왕자'의 생텍쥐페리 삽화를 상표로 등록해 프랑스와 미국 일본 등에서 상표권을 행사하고 있다.

상표권 기간이 만료되면 상표등록을 연장하고 상표권 지정 대상도 늘려왔다.

한국 내 공식 에이전트는 유명 해외 패션 브랜드의 라이선스 사업을 하고 있는 GLI컨설팅이다.

국내에 처음 상표로 등록된 생텍쥐페리의 삽화는 어린왕자가 혹성에서 별을 바라보는 이미지.

등록 시기는 1996년 10월이다.

그런데 10여년이나 상표권 침해를 문제 삼지 않던 소젝스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강경하게 나왔다.

왜 그랬을까.

국내 업체와 상표 사용에 관한 독점계약을 별도로 맺었기 때문이다.

소젝스는 지난해 10월 국내에서 이 상표권들을 독점 사용하기로 디자인 문구업체인 아르데코7321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아르데코7321은 이들 삽화를 이용한 수첩과 다이어리 등 각종 문구를 제작해 판매하고 있다.

이 업체는 '어린왕자' 출간을 앞두고 기존 도서 시장의 상표권 침해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GLI컨설팅 관계자는 "이전에는 공식 계약을 맺은 업체가 없었으나 아르데코7321과의 계약 이후 의뢰인의 권리보호 차원에서 서점과 출판사에 판매중지를 요청하는 통고서를 보냈다"고 말했다.

출판 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외국의 로열티 장사에 휘말린 국부유출 사태"라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책은 상표권이 아니라 저작권 적용 대상인데 작가 사후 50년이 지나 저작권이 소멸된 책의 삽화를 별도로 분리해 상표권 등록을 해준 것은 저작권법 취지에 배치되는 처사"라며 법적 대응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법원을 통한 판매정지 가처분 신청 등의 절차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고서를 보내 책 판매 중지를 요구한 것에 대해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어린왕자'는 프랑스 작가 생텍쥐페리(1900~1944)가 죽기 1년 전인 1943년에 펴낸 작품.

따라서 작가 사후 50년까지로 규정된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나 1945년부터는 누구나 출판·판매할 수 있다.

또 저작권법상 저작물의 범위가 활자뿐만 아니라 그림과 도형 등 책 속의 모든 콘텐츠를 포함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는 만큼 판매중단 요구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출판계의 입장이다.

1972년부터 '어린왕자'를 번역 출판해온 문예출판사의 전병석 사장(71)은 "지난 1월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사용금지를 통고하는 내용증명서를 받고 상표가 아니라 저작물이기 때문에 저작권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서면 답변서를 전달했다"며 "앞으로 출판사들과 연대해 특허청에서 상표등록을 해준 것에 대해 무효 소송을 준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00년부터 '어린왕자'를 펴내고 있는 비룡소의 박상희 대표도 "법률자문 결과 이 제호와 삽화는 상표권 대상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고 인피니스 측에 공문을 보냈다"면서 "도서 공급을 중지할 계획은 없으며 계속 문제 삼을 경우 법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맞서면서 상표권과 저작권을 둘러싼 법 적용 문제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책속의 삽화와 제호를 상표로 인정할 수 있는가' '상표권과 저작권법이 충돌할 때 어느 쪽 입장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가'가 그것이다.

향후 법적인 분쟁으로 번질 경우 법원의 판단이 어떻게 나올지도 주목된다.

GLI컨설팅 측은 이와 관련,"스토리를 문제 삼는 게 아니라 상표 등록된 이미지를 도용이나 모방했을 경우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것"이라며 "상표권은 보호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했다.

'어린왕자'에 사용된 모든 삽화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고 등록된 삽화 2컷과 제목서체 등 4종을 사용한 책들을 문제 삼는 것이기 때문에 적법한 요구라는 것이다.

그러나 출판 전문가들은 이와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상표권 침해는 상표로 사용했을 경우에 해당하며 상표로 등록된 그림이라도 특정 상품과 구별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면 '어린왕자' 책의 삽화는 상표권 침해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저작권법 전문가인 김기태 세명대 교수는 "책에 쓰인 해당 그림과 글자는 상표가 아니라 콘텐츠의 일부인 저작물"이라며 "이 사안은 상표권의 남용에 해당된다"고 지적했다.

고두현 한국경제신문 기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