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망할 놈의 인권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9)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
2002년 독일의 한 법대 학생이 여자 친구에게 선물사 줄 돈을 마련하기 위하여 11살 된 부잣집 아들을 유괴하고 아이의 부모에게 돈을 요구했다.

이 학생을 체포한 경찰은 아이의 소재를 추궁했지만 법을 잘 아는 그는 묵비권을 행사했다.

이미 유괴한 지 3일이 지난 시점이었고 아이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경찰국 부국장 볼프강 다슈너는 아이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고문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결국 범인은 협박에 못 이겨 아이의 소재를 알려주었으나 경찰이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죽어 있었다.

1심에서 유죄를 받았던 이 학생이 2003년 재심을 청구하면서 경찰로부터 고문협박을 받았다고 진술하는 바람에 독일은 엄청난 논란에 휩싸였다.

경찰은 다슈너 부국장을 옹호했지만 법률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독일 국제사면위원회(Amnesty)는 다슈너에 대한 수사 개시를 요구하였다.

결국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다슈너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벌금형을 받은 그는 경찰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괴된 아이를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자문해 보았다.

우리는 아이를 살리고 싶었을 뿐이다."

다슈너 부국장의 재판정에서의 진술은 많은 독일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다슈너를 지지하는 국민이 60%나 되었으나 독일 헌법은 체포된 피의자를 정신적 또는 육체적으로 학대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법률가와 법학자 다수는 다슈너에 대한 재판 결과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일부 시민단체는 다슈너 부국장에게 가해진 벌금형이 너무 경미하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 유 메모(Yoo Memo)

지난달 미 정부는 '정보자유법'에 의해 '테러와의 전쟁'과 관련한 비밀문서들을 공개했다.

2003년 당시 미 법무성의 변호사였던 존 유(John Yoo·현재 미국 UC Berkeley 대학의 법대 교수)에 의해 작성된 유 메모는 국가 안보와 인권에 대한 민감한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어 논란의 중심이 되었다.

쟁점의 핵심은 테러와의 전쟁 중에 체포한 유력한 피의자로부터 결정적인 정보를 끄집어내기 위해 고문을 가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다.

당시 미 국방부는 전쟁포로들을 학대했다고 전 세계 여론으로부터 빗발치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주로 산발적인 게릴라전을 벌이는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포로들로부터 정보를 얻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전쟁포로에 대한 제네바 협정이나 미국의 법은 비인간적인 고문을 인간에 대한 범죄로 단정하고 금지하고 있다.

국방부로서는 정부의 법률적인 해석과 지침이 필요했다.

유 메모는 국방부에 테러와의 전쟁 중 생포한 포로나 테러용의자를 심문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고문 방법을 규정해주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워터보딩(waterboarding)은 생명에 직접적인 위협은 없으나 피의자가 곧 익사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데 유 메모는 이 심문 방식이 고문이 아니라고 판단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결론은 유 메모가 주장하는 고문의 정의와 관련 있다.

'죽음이나 신체 일부의 영구적인 손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신체적 학대와 결부된 고통'이라고 고문의 법률적 의미를 한정했다.

아부그라비 수용소에서 있었던 포로 학대,즉 짖어 대는 군견 바로 앞에 얼굴을 가린 채 꿇어앉혀 놓거나 모욕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 후 사진을 찍어대는 행위들은 신체에 대한 직접적인 위해가 아니므로 고문이 아닐 수 있다.

유 메모는 야당과 비판언론의 표적이 되었다.

포로 학대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이 병사 몇 명의 잘못이 아니라 국방부나 정부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된 인권유린의 몇 가지 들추어진 사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부시 대통령은 정부기구를 동원해 인권을 유린한 반민주적인 지도자가 되었고 존 유 교수는 학자적 양심을 버리고 정부의 범죄를 합리화한 비양심적인 지식인이 되었다.

⊙ 고문영장을 허(許) 하라

그러나 유 메모를 놓고 파렴치한 음모나 범죄의 증거로만 단정하는 것은 다소 지나치다.

유 메모의 쟁점 내용들은 9·11 이후 '국가안보'(사회안전)와 '개인의 인권'에 대한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미 법조계 일각의 진지한 문제 제기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9·11 직전에 경찰은 비행기 테러와 관련된 한 용의자를 체포한다고 가정하라.

큰 건물을 폭파할 계획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어떤 방법으로 어떤 목표를 공격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없다.

경찰은 용의자를 심문한다.

자백을 하면 많은 돈과 새로운 신분증을 주겠다고 거래를 시도한다.

그는 거래를 거절한다.

경찰은 용의자를 협박하기 시작한다.

법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지만 법적인 어떤 시도도 먹히지 않는다.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정보는 더 이상 얻을 수 없다.

한 FBI요원이 치명적이지 않은 고문을 제안한다.

바늘로 손톱 아래를 후비는 것같이 고통은 크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그런 방법이다.

(중략)

단순히 비용과 이익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고문은 유익하다.

용의자에게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를 가함으로써 수많은 시민의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은 죽음보다는 가볍고 회복 가능하기 때문에 수많은 시민의 생명이 한 용의자의 인격의 고귀함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왜 테러리즘은 작동하는가? 그 도전에 대한 반응과 위협의 이해/ 더쇼위츠 Dershowits 하버드 법대 교수)

더쇼위츠 교수의 주장처럼 신사적인 방법만으로는 목숨을 걸고 테러를 감행하기로 마음먹은 이들을 제지할 수 없는 상황이 현존한다.

국가나 사회의 안전이 위급한 결정적인 상황이라면 용의자의 목숨이나 신체에 직접 훼손을 가하지 않는 치명적이지 않은 고문은 합법적으로 허락되어야 하지 않을까?

용의자의 인권보다 수백 명의 무고한 시민의 생명이 더 귀중하다는 더쇼위츠나 존 유 교수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파렴치하고 비민주적인 주장일 뿐일까?

⊙ 두 개의 민주적 가치

더쇼위츠 교수가 고문에 대해 법률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주장했을 때 그는 보수와 진보를 포함한 대다수의 동료 법학자들로부터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받아야 했다.

신체뿐 아니라 개인의 인격을 파괴할 수 있는 고문은 어떤 경우에도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 민주주의의 신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신념은 용의자가 윤리적으로 파렴치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두드러졌었다.

일반의 감정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파렴치범도 인권을 존중하는 민주주의의 법률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다.

다수의 판정에 넘겼더라면 그 자리에서 돌에 맞아 죽을 게 뻔 할 정도로 공분(公憤)의 표적이 된 이들도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증거에 기초한 재판을 받기까지는 일반시민이 누리는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받았다.

파렴치범의 인권까지 보호하는 민주주의를 문명의 금자탑으로 여기는 대다수 민주주의자들에게 더쇼위츠나 존 유 같은 이들은 법치와 문명을 파괴하고 대중의 분노를 법보다 우위에 두는 전근대의 야만으로 돌아가자는 논리를 설파하는 이단으로 보이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파렴치범이나 극히 위험한 테러용의자에게 가해진 극히 제한적인 학대보다는 아이들이나 시민들의 안전이 훨씬 중요하다는 생각 역시 민주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들의 행복을 수량화해서 이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것이 민주적으로 선하다면 시민 다수의 안전을 위해 보호할 가치가 의심스러운 위험한 이들의 권리를 제한한다는 생각도 충분히 선할 수 있다.

더쇼위츠 교수의 생각은 바로 공리주의의 대가인 제레미 벤담 같은 거두에게 맥이 닿아있다.

그리고 공익(公益)을 거론할 때면 누구나 개개인의 행복을 합할 수 있고 이를 극대화하는 방향이 선하다는 전제를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셈이다.

결국 공익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보면 합법적인 고문을 허락하자는 더쇼위츠 교수나 이를 구체화한 유 메모까지 나아가는 길이 그다지 멀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개인의 기본권은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현대 민주주의의 큰 주춧돌이다.

이런 생각은 다수의 행복을 위해서는 소수의 행복을 어느 정도 훼손할 수 있다고 믿는 공리주의적 이상과는 긴장(緊張)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국민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정부를 주기적으로 바꿀 수 있는 국가라면 국가 안보나 범죄 억제를 강조하는 이들과 범죄자의 인권까지 보호해야 한다는 이들 간의 싸움을 꼭 야만 대 문명,비민주 대 민주로까지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

민주주의 대 민주주의의 싸움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진실에 더 가깝다.

민주주의는 의외로 모호하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들이 다가올 세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호기와 교만에 기초해서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누리는 후대가 창시자들의 생각에 교조적으로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큰 틀은 주어져 있지만 세부적인 얼개는 그 시대 속에서 창조적으로 메워 완성해야 할 숙제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남겨진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