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원시간 규제의 의미

얼마 전 서울시 의회는 학원수강 시간을 제한하는 규정을 폐지하려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시민단체는 학생들이 새벽까지 학원가를 배회하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고 대통령도 같은 취지에서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서울시 의회는 일주일여 만에 학원 영업 시간 자율화안을 백지화했다.

사실 학원들은 영업 시간 제한 규정을 거의 지키지 않고 있다고 한다.

학원수업을 받으려는 학생이나 학부모들은 영업 시간 제한 규제를 의식하지 않으며, 심지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번 여론 수렴 과정에서 영업시간 제한이 지켜지지 않은 규정이라는 목소리는 설 땅이 없었다.

학교가 학생들을 오후 10시, 11시까지 붙잡아 두는 현실에서 만일 이 규정이 엄격히 지켜졌다면 학원들은 대부분 폐업했어야 논리에 맞다.

영업 시간 제한 규정은 학원들에 사실상 영업을 하지 말라는 내용이지만 학원은 날로 번창하고 있으니 그들의 사업 수완이 놀라울 뿐이다.

규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더 많고 당국조차 감시하지 않는 분위기라면 규제를 지키는 순진한 사람들만 극단적으로 손해를 보게 마련이다.

법치국가에서 이런 규제를 정당화하는 일은 무척이나 낯 두꺼운 일이다.

그런데 '그나마 이 규제마저 없다면 밤을 꼬박 세우는 학원들이 성업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규제를 옹호하는 이런 논리를 주목해 보자.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논리는 이해 당사자들이 이 규제에서 기대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이 규제가 존재해야만 하는 진정한 이유는 이 조항이 말하는 문자 그대로의 법률적인 의미와 무관하던가,아니면 그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 공부 안하기 협약

교장선생님은 자기 학교 학생들이 내신에만 몰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내신공부에 쏟을 시간을 수능이나 논술에 투자하는 게 학교의 전반적인 합격률을 높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교장선생님 입장에서는 내신은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이다.

철수가 1등급을 받거나 영희가 1등급을 받거나 차별이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중간고사 전에 학생들을 강당에 모아 놓고 '내신공부 안하기 협약'이라도 맺도록 하고 싶으실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학교들은 학교 시험문제를 쉽게 내는 전략을 선택한다.

내신공부 덜하기 협약의 교육적 개량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선택되는 이 전략은 의도한 바를 성취하기 어렵다.

내신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무한경쟁을 완화하자는 의도였다면 오히려 이 전략은 의도한 바와 정 반대의 효과를 낼 가능성이 높다.

문제가 쉬울수록 소위 벼락치기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문제가 쉬울수록 무한경쟁에 뛰어드는 참가자의 저변은 확대된다.

원래 공부 안하기 협약 같은 카르텔은 깨지기가 쉽다.

게다가 약속을 하는 당사자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협약이 깨지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봐도 좋다.

상대방이 협약을 지킨다고 여길수록 자신은 협약을 깰 때의 이익이 많아진다.

조금만 노력해도 상대방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단 한 명만 협약을 깨서 큰 이익을 챙겨도 다음부터는 바로 무한경쟁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 무한 군비경쟁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7) 철야 학원이 성업하지 않는 진짜 이유
소모적인 무한경쟁은 주로 군비경쟁에 비유된다.

서로에게 치명적인 파멸을 줄 수 있는 적대적인 두 나라가 있다고 치자.

자원의 규모가 비슷한 두 나라는 국방에 대부분의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가난하더라도 국방력을 튼튼하게 만들어 놓는 편이 부유하게 지내다가 적에게 파멸당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나라는 무한정 군비 늘리기 게임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두 나라의 안전은 나아진 게 없다.

피차 국방에 자원을 쓰지 않고 경제와 복지에 사용할 때와 결과는 동일하다.

두 나라가 추구하는 안전이라는 목표가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무한 군비경쟁은 20세기 후반 미국과 소련의 파멸적인 핵무기 경쟁이 모델이다.

두 강대국의 끝없는 경쟁은 지구를 당장이라도 끝장내고 말것이라는 묵시적 예언이 한동안 유행했다.

자유진영에 속한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두 강대국이 군축협의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정보가 통제된 소련의 실상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고 간여할 수도 없었지만 미국의 국방력 증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과 정치적 저항이 적지 않았다.

결국 1985년부터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과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사이에 군축협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축협상이 냉전을 종식시키는 원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축협상은 냉전종식의 열매였다.

정말로 국방에만 치중하다 경제가 파탄난 소련이 더 이상 미국과의 군사력 경쟁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서야 군축협상은 선언적인 의미를 넘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 군비경쟁 모델의 비현실적인 전제들

교장선생님이 중간고사 문제를 쉽게 출제하라고 선생님들께 주문할 때나 시민단체가 학원 영업시간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머릿속에 그리는 이미지는 바로 소모적인 군비경쟁이다.

그런데 내신 공부가 소모적 경쟁일 뿐이라는 전제는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중간고사 공부가 수능 공부와 전혀 무관할까?

경험을 통해 학생들은 이 전제가 비현실적이라는 걸 알고 있다.

어떤 학생들은 그나마 중간고사라도 있어 수능 준비를 평소에 조금씩 하게 된다.

더구나 선생님들이 소신을 갖고 진지하게 출제한 학교시험이 수능과 무관할리 없다.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쉽거나 답을 미리 가르쳐 주는 문제야 말로 수능공부에 도움이 되지 않는 소모적인 경쟁만을 유발한다.

따지고 보면 교장선생님 입장에서 가장 좋은 전략은 내신공부 안하기 카르텔이 아니라 수능과 가깝게 문제를 출제하고 수능에 임하는 자세로 공부하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지식인들이 학생들의 입시 경쟁이 소모적이라고 주장할 때의 논리적 전제는 이보다 훨씬 더 기괴하다.

교과 지식의 습득과 거기에 쏟는 에너지가 의미 없다고 말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필수과목 하나를 선택으로 바꾸려고만 해도 전공분야의 교수들은 집단적으로 들고 일어난다.

자신들의 전공이 얼마나 중요하며 왜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져야만 하는지를 역설하기 위해서다.

그런 신념과 주장이 바탕이 되어 과목과 단원이 추려졌다.

그런데 입시경쟁이라는 화두만 던져지면 교과단원의 지식습득이 무의미의 나락으로 전락하고 만다.

실현가능성이 없는 인위적인 경쟁완화 정책을 고민하기 이전에 할 일이 명쾌하다.

밤 새워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는 단원과 과목들을 과감하게 삭제하라.

패자마저도 경쟁에 참여하여 얻을 게 있을 때 무한 군비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식인들 스스로 인정한 무익한 지식은 과감하게 폐기하고 패자도 얻는 게 있는 유익한 알맹이로 채우면 상황은 훨씬 나아진다.

⊙ 철야 학원이 드문 진짜 이유

수강시간 규제는 사실 군비 축소협약의 판박이다.

다만 두 강대국 사이의 협약이라기보다는 유엔 권고문의 성격이 더 강하다.

규칙을 어길 때의 현실적인 제약보다는 선언적인 의미에 훨씬 높은 비중을 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철야학원이 드문 건 어떤 배경에서 일까?

비록 선언적 의미였지만 학원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렇지 않다.

철야학원이 학생들의 성적 향상에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철야학원이 성적 향상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면 이미 불야성을 이루고 있어야 맞다.

당국의 강력한 감시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이 수학시험을 바로 앞두고 학원에 가거나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경우는 드물다.

시험이 다가올수록 강의 청취보다는 자기학습의 비중을 높이기 마련이다.

강의의 청취가 학습에 도움이 되긴 해도 시간당 생산성에서 자기학습을 따라올 수 없다.

철야학원은 시험을 코 앞에 둔 단기 코스용으로 쓰일 수 있지만 상위권 학생들이 애용할 방법은 아니다.

물론 붙잡아 앉혀놓고 공부시키는 철야학원이 성업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이들이 대상이 아니다.

무한 군비경쟁을 두려워하면서 경쟁적 우월성이 적은 전략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 도태될 전략이거나 살아남더라도 주류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 법치의 수준

법치가 완성된 사회일수록 법률조항은 문자적 의미에 국한되는 경향이 있다.

누가 봐도 동일하게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일단 만들어진 조항은 곧이 곧대로 준수된다.

규칙을 지키는 사람의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법률조항을 도덕적 결의나 선언으로 사용하는 사회일수록 규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대체로 약하다.

어쩌면 구성원 대다수가 규칙을 어기기 때문에 법 조항만이라도 고상한 이상을 담아야 한다는 균형감각이 발동하는지도 모른다.

교칙에 학교를 사랑하고 스승을 존경하라는 조항이 삽입된 학교의 평소 분위기를 짐작하게 된다.

적어도 이런 불필요한 조항으로 가득한 교칙을 구성원 대다수가 숙지하고 있으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자치단체의 조례까지 이상적이며 선언적 의미를 기대하는 우리사회의 법치는 도대체 어느 수준이라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