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한국경제신문 3월11일자 A39면
어제 경제학과를 비롯한 일단의 서울대 교수들이 대운하 반대 행동계획에 돌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반대운동을 벌인 지 거의 40년 만이지 싶다.
당시 변형윤 교수 등 소위 지식인 그룹은 경부고속도로가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적이며 대다수 국민이 아닌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을 진원지로 한 학생운동이 세계 각국의 정치권을 흔들던 와중이었다.
3선 개헌이며 유신헌법이 준비되던 과정에 있었으니 개발독재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반대 열풍으로 옮겨붙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맞을 테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최근 증언에 의하면 그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것이 학자들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무 장관인 건설부 장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료들도 반대했다니 실로 감회가 무상하다.
후진국 개발 기구였던 IBRD도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으니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이들은 왜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을까.
시멘트를 쳐바르고 산허리를 깨뭉개며 안온한 농촌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고속도로라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변형윤 교수의 주장대로 당시 한국 사람 중에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민들이 허리를 굽혀 땀흘리며 일하는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 놓으면 소수의 부자들이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당치 않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간단 명료한 주장만으로도 수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현대건설에서 일하던 약관의 이명박 사원이 40년이 지난 지금 대운하를 추진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어 있고 변 교수의 제자였던 그때의 학생들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다시 대운하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의 대운하 반대운동 그룹의 좌장 격인 이준구 교수는 얼마 전에 "경제성 평가란 것은 고무줄과 같아서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계산이 안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렇다면 반대운동의 근거는 또 무엇인지 종잡기 어렵다.
일제(日帝)가 들어와 전국에 신작로를 낸 것을 두고 얼마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오솔길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으로 해방 후 한국은 산업화의 젖줄로 삼았던 것도 부인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자연의 간계(奸計;cunning of reason)라는 철학 용어를 빌려와야만 비로소 설명이 되는 일이다.
역사는 이처럼 때로 멀쩡한 사람의 계산만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오묘한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운하 반대론자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환경보호라는 것도 그 역사가 비슷하다.
프랑스에서 1968년 문화혁명의 깃발이 오른 직후인 1970년대 초에 '성장의 한계'론이 공식화되었고 이후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지구 종말적 예언들이 환경보호론의 외피를 입고 지금까지 맹위를 떨쳐왔다.
우리가 아는 소위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시장경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요,유럽 대학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평준화의 깃발을 올린 것도 이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어제 서울대 교수들이 치켜든 대운하 반대 깃발을 보며 40년 세월이 화살 같음을 느낀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에 막걸리를 따라 올리는 실로 정감 넘치는 기념식을 가졌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인의 꿈을 실은 배를 대운하에 띄울 수 있을 것인가.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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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경계해야
▶ 해설
대형 국토 개발 사업의 효과를 측정하기는 사실 매우 힘들다.
경제학자들은 국토 개발 계획을 세울 때 '비용 편익분석'이라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측정하고 평가한다.
사업 시행에 들어가는 비용과 완성 이후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비교해서 수익이 더 클 때 시행한다.
하지만 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정확히 계산해내기는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로 인한 비용만 하더라도 측정 기관에 따라 측정 방법에 따라 몇 십배 차이를 보이곤 한다.
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나 수익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편차가 큰 것이 사실이다.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운하 건설 사업을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 비용을 줄이고 각종 자동차 매연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대학교수와 시민단체들은 한강 낙동강의 상수원 오염,예산 낭비 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어느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더욱이 최고 권위의 대학교수들이 반대할 경우 사람들은 그 쪽으로 귀가 솔깃해지기 쉽고 그래서 높은 지위일수록 신중을 기해 의견을 표시해야 한다.
자칫 국가적 대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연구소장은 과거 정부가 대형 토목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일부 교수들이 번번이 정부 정책을 반대했던 사례를 들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질타하고 있다.
정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변형윤 당시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경제학자들은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적인 대형 토목 사업의 반대에 앞장섰다.
만일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수출품 납기에 맞추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빨리 제품을 선적해야 하는 기업들이 서울 구로공단에서 만든 수출 의류를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부산항으로 운송했다면 우리 수출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공무원들이 단체로 우리의 경제개발 모델을 배우러 올 만큼 경제 성장에 관한 한 세계 모범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과학 실험과 달리 경제 정책은 한 번 시행하면 돌이킬 수 없어 신중을 기해 추진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강원도 양양,전남 무안 등 일부 지방에 공항이 과잉 투자돼 예산이 낭비되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정부 정책에 매번 제동을 건다는 것은 그들의 판단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필요한 정책이 반대 여론으로 인해 실기를 하거나 과잉 검증 과정을 거칠 경우 또 다른 비용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3월11일자 A39면
어제 경제학과를 비롯한 일단의 서울대 교수들이 대운하 반대 행동계획에 돌입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60년대 말 경부고속도로 반대운동을 벌인 지 거의 40년 만이지 싶다.
당시 변형윤 교수 등 소위 지식인 그룹은 경부고속도로가 환경을 파괴하고 낭비적이며 대다수 국민이 아닌 극소수 부자들만을 위한 것이라며 조직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때마침 프랑스와 독일을 진원지로 한 학생운동이 세계 각국의 정치권을 흔들던 와중이었다.
3선 개헌이며 유신헌법이 준비되던 과정에 있었으니 개발독재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경부고속도로 반대 열풍으로 옮겨붙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일이라고 해야 맞을 테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최근 증언에 의하면 그때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던 것이 학자들만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무 장관인 건설부 장관을 제외한 거의 모든 관료들도 반대했다니 실로 감회가 무상하다.
후진국 개발 기구였던 IBRD도 경제성이 없다며 반대했으니 긴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다.
이들은 왜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을까.
시멘트를 쳐바르고 산허리를 깨뭉개며 안온한 농촌 도시의 중심부를 가로질러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고속도로라는 것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변형윤 교수의 주장대로 당시 한국 사람 중에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민들이 허리를 굽혀 땀흘리며 일하는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 놓으면 소수의 부자들이 그들의 젊은 처첩들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을 놀러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러니 당치 않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런 간단 명료한 주장만으로도 수많은 대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때 현대건설에서 일하던 약관의 이명박 사원이 40년이 지난 지금 대운하를 추진하겠다며 대통령이 되어 있고 변 교수의 제자였던 그때의 학생들이 지금은 대학교수가 되어 다시 대운하 반대운동에 뛰어들었다.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서울대의 대운하 반대운동 그룹의 좌장 격인 이준구 교수는 얼마 전에 "경제성 평가란 것은 고무줄과 같아서 정확한 계산이 어렵다"고 했다.
그런데 계산이 안 된다는 것은 또 무엇이며 그렇다면 반대운동의 근거는 또 무엇인지 종잡기 어렵다.
일제(日帝)가 들어와 전국에 신작로를 낸 것을 두고 얼마나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오솔길을 그리워했는지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으로 해방 후 한국은 산업화의 젖줄로 삼았던 것도 부인할 수만은 없다.
이것은 자연의 간계(奸計;cunning of reason)라는 철학 용어를 빌려와야만 비로소 설명이 되는 일이다.
역사는 이처럼 때로 멀쩡한 사람의 계산만으로는 예측하기 어려운 오묘한 계획을 진행시키기도 하는 모양이다.
대운하 반대론자들이 전면에 내세우는 환경보호라는 것도 그 역사가 비슷하다.
프랑스에서 1968년 문화혁명의 깃발이 오른 직후인 1970년대 초에 '성장의 한계'론이 공식화되었고 이후 산업화 자체를 부정하는 지구 종말적 예언들이 환경보호론의 외피를 입고 지금까지 맹위를 떨쳐왔다.
우리가 아는 소위 진보적 가치라는 것이 시장경제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요,유럽 대학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폐기하고 평준화의 깃발을 올린 것도 이 운동의 결과물이었다.
어제 서울대 교수들이 치켜든 대운하 반대 깃발을 보며 40년 세월이 화살 같음을 느낀다.
박정희 대통령은 새로 개통된 경부고속도로에 막걸리를 따라 올리는 실로 정감 넘치는 기념식을 가졌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21세기 한국인의 꿈을 실은 배를 대운하에 띄울 수 있을 것인가.
jkj@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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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를 위한 반대' 경계해야
▶ 해설
대형 국토 개발 사업의 효과를 측정하기는 사실 매우 힘들다.
경제학자들은 국토 개발 계획을 세울 때 '비용 편익분석'이라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측정하고 평가한다.
사업 시행에 들어가는 비용과 완성 이후 얻을 수 있는 수익을 비교해서 수익이 더 클 때 시행한다.
하지만 사업에 들어가는 비용이나 얻을 수 있는 수익을 정확히 계산해내기는 매우 힘들다.
예를 들어 환경 파괴로 인한 비용만 하더라도 측정 기관에 따라 측정 방법에 따라 몇 십배 차이를 보이곤 한다.
학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비용이나 수익을 합리적으로 계산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제시하고 있지만 아직도 편차가 큰 것이 사실이다.
새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운하 건설 사업을 두고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정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운하가 건설되면 물류 비용을 줄이고 각종 자동차 매연을 감소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일부 대학교수와 시민단체들은 한강 낙동강의 상수원 오염,예산 낭비 등을 들어 반대하고 있다.
일반 국민들은 어느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 힘들다.
더욱이 최고 권위의 대학교수들이 반대할 경우 사람들은 그 쪽으로 귀가 솔깃해지기 쉽고 그래서 높은 지위일수록 신중을 기해 의견을 표시해야 한다.
자칫 국가적 대사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겸 경제교육연구소장은 과거 정부가 대형 토목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일부 교수들이 번번이 정부 정책을 반대했던 사례를 들어 '반대를 위한 반대'를 질타하고 있다.
정 소장이 지적한 것처럼 변형윤 당시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일련의 경제학자들은 경부고속도로 등 국가적인 대형 토목 사업의 반대에 앞장섰다.
만일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수출품 납기에 맞추기 위해 한 시간이라도 빨리 제품을 선적해야 하는 기업들이 서울 구로공단에서 만든 수출 의류를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따라 부산항으로 운송했다면 우리 수출 상품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을까?
중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공무원들이 단체로 우리의 경제개발 모델을 배우러 올 만큼 경제 성장에 관한 한 세계 모범이 될 수 있었을까?
물론 과학 실험과 달리 경제 정책은 한 번 시행하면 돌이킬 수 없어 신중을 기해 추진해야 하는 것이 사실이다.
강원도 양양,전남 무안 등 일부 지방에 공항이 과잉 투자돼 예산이 낭비되고 있는 사례도 있다.
그러나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채 정부 정책에 매번 제동을 건다는 것은 그들의 판단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필요한 정책이 반대 여론으로 인해 실기를 하거나 과잉 검증 과정을 거칠 경우 또 다른 비용이 들어 갈 수밖에 없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