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 선택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그의 작품들은 비록 만화영화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은 대서사시여서 어른들에게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화면 자체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깔끔하고 세련됐다.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적 담론과 철학적 깊이를 갖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 DVD는 할인판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일반 매장에선 개당 2만7000원을 웃돌고, 싸게 판다는 인터넷 쇼핑몰조차 2만3000원을 넘는다.
나온 지 10년을 넘긴 작품도 가격이 떨어지는 법이 없고 절판되기 일쑤여서 구하기도 어렵다.
왜 마야자키의 작품들은 싸게 안 팔까.
조금 가격을 낮추면 훨씬 잘 팔릴 텐데.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전략적 선택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기다려 봐야 소용 없다
미야자키 작품의 판매 방식은 소비자들에겐 불만이지만 매우 전략적인 행동으로 평가된다.
싸게 안 판다고 공언하고 실제로 단 한 번도 할인판매를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마야자키의 만화 DVD를 사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 없다는 점을 각인시켰다.'보고 싶으면 당장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
이는 재고를 쌓아두느니 아예 태워버림으로써 명성을 유지하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판매전략을 연상시킨다.
과거 월트디즈니도 이런 판매 방식을 고수했다.
디즈니의 만화는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수십년 동안 제한된 수량의 일부 만화영화 비디오테이프만 출시했다.
또 새로나온 작품을 한 번 팔고 나면 적어도 10년 내에 다시 판매하지 않았다.
10년이면 그의 작품을 본 아이들이 다 큰 뒤다.
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은 것이다.
다다익선인 일반 제품들과는 전혀 다른 판매 방식이다.
하지만 디즈니 만화 비디오테이프, DVD 등이 대거 불법 복제돼 유통되자 디즈니는 전략을 바꿨다.
아예 출시된 지 오래된 작품은 할인판매로 선회한 것이다.
비싼 가격을 고수해 불법 복제를 하고 싶도록 자극하느니, 아예 1만원 안팎으로 가격을 내려 정품을 사게끔 유도하는 전략이다.
⊙ 배수진의 전략적 함의
전투를 앞두고 배수진을 친 사례는 동서고금에 무수히 많다.
'정복왕' 노르망디공(公) 윌리엄은 1066년 영국을 정복할 때 후퇴수단인 함대를 불태웠다.
불과 11척의 함대와 7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코르테즈 역시 10만명의 군대를 가진 아즈텍왕국의 몬테주마왕을 공격할 때(1521년) 함대 소각이란 전략을 재현했다.
수백 배에 달하는 상대방을 격퇴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는지는 영화 '300'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병사들에게 죽음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벼랑끝 전략은 '삼국지'를 보면 무수히 많다.
대개 숫적으로 열세일 때 다수의 적과 맞서려면 대개 성공했다.
북한의 핵을 이용한 전략도 이와 유사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처럼 배수진이 걸맞지 않은 상황에 배수진을 쳤다가 오히려 실패한 경우도 있다.
기업의 역사에도 배수진과 같은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00년을 전후해 미국 정유시장의 95%를 독점한 스탠더드오일의 '약탈적 가격'(predatory pricing)이다.
가격을 원가 이하로 매우 낮게 책정해 경쟁기업들을 시장에서 몰아낸 뒤 다시 가격을 올려 손실을 회복하는 가격 정책을 뜻한다.
스탠더드오일은 당장 자신도 손해이지만 이를 감수하고 경쟁 상대가 망할 때까지 낮은 가격을 유지했다.
그러니 스탠더드오일에 맞설 경쟁자가 사라졌고,미국 대법원이 1911년 회사 분할을 명령할 때까지 독점을 누렸다.
스탠더드오일이 쪼개져 생긴 회사들이 엑슨모빌, 아모코 등 오늘날 미국의 정유사들이다.
⊙ 가수 토니 베넷의 전략적 행동
뉴욕타임스 1999년 5월2일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그해 워너브라더스의 히트작 '애널라이즈 디스'의 대본에서 갱 두목(로버트 드 니로 扮)과 그의 정신과 의사(빌리 크리스털 扮)는 모두 미국 재즈 가수 토니 베넷의 열렬한 팬으로 나온다.
앞서 드 니로는 1997년 말 영화 제작 당시 한 파티장에서 이미 나이 70세에 가까운 베넷을 만나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화사의 연락을 기다리던 베넷은 그 이후 1년 가까이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다 뒤늦게 워너 측으로부터 노래 부르는 장면을 찍는 조건으로 1만5000달러를 제안 받았다.
이 때 워너 측은 영화 촬영이 거의 끝났다고 베넷 측에 알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칼자루는 워너가 아니라 베넷으로 넘어갔다.
결국 워너 측은 토니 베넷이 노래 부르는 대가로 20만달러를 지불해야 했다.(<버냉키·프랭크 경제학>에서 재인용)
워너 측이 전략적 행동을 할 줄 알았다면 베넷과 영화 촬영 전에 협상했어야 했다.
그때 베넷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렀다면 대본을 수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촬영을 다 끝냈음을 상대방이 아는 협상이라면 영화사로선 상대방이 부르는 대로 돈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완전히 새로 찍어야 할 테니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고, 장기의 외통수와 같은 상황이다.
⊙ 논술은 전략적 선택과 유사
논술 문제의 제시문들은 대개 딜레마적 상황으로 구성된다.
이상과 현실,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개발과 환경, 성장과 분배….
어느 한 쪽만 고집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양시론 양비론으로 갈 수도 없다.
인간 세상사가 끊임없는 딜레마 속에 선택 과정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동의할 정답도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대응전략을 찾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이해는 논술문제를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라면 나의 행동이 상대의 전략을, 상대의 행동이 내 전략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편들 경우 위험부담이 생긴다.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딜레마 속에 좌충우돌하는 상황일수록 전략적 선택은 더욱 중요해진다.
물론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신빙성 있는(윌리엄과 코르테즈의 함대 소각과 같은)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소용없겠지만….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com
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는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다.
그의 작품들은 비록 만화영화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은 대서사시여서 어른들에게도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화면 자체도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깔끔하고 세련됐다.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이르기까지 인문학적 담론과 철학적 깊이를 갖는다.
하지만 그의 영화 DVD는 할인판매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일반 매장에선 개당 2만7000원을 웃돌고, 싸게 판다는 인터넷 쇼핑몰조차 2만3000원을 넘는다.
나온 지 10년을 넘긴 작품도 가격이 떨어지는 법이 없고 절판되기 일쑤여서 구하기도 어렵다.
왜 마야자키의 작품들은 싸게 안 팔까.
조금 가격을 낮추면 훨씬 잘 팔릴 텐데.
경제학에서 얘기하는 전략적 선택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 기다려 봐야 소용 없다
미야자키 작품의 판매 방식은 소비자들에겐 불만이지만 매우 전략적인 행동으로 평가된다.
싸게 안 판다고 공언하고 실제로 단 한 번도 할인판매를 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마야자키의 만화 DVD를 사고 싶은 소비자들에게 아무리 기다려도 소용 없다는 점을 각인시켰다.'보고 싶으면 당장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 것.
이는 재고를 쌓아두느니 아예 태워버림으로써 명성을 유지하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의 판매전략을 연상시킨다.
과거 월트디즈니도 이런 판매 방식을 고수했다.
디즈니의 만화는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지만 수십년 동안 제한된 수량의 일부 만화영화 비디오테이프만 출시했다.
또 새로나온 작품을 한 번 팔고 나면 적어도 10년 내에 다시 판매하지 않았다.
10년이면 그의 작품을 본 아이들이 다 큰 뒤다.
사고 싶다고 아무 때나 살 수 있는 게 아니란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은 것이다.
다다익선인 일반 제품들과는 전혀 다른 판매 방식이다.
하지만 디즈니 만화 비디오테이프, DVD 등이 대거 불법 복제돼 유통되자 디즈니는 전략을 바꿨다.
아예 출시된 지 오래된 작품은 할인판매로 선회한 것이다.
비싼 가격을 고수해 불법 복제를 하고 싶도록 자극하느니, 아예 1만원 안팎으로 가격을 내려 정품을 사게끔 유도하는 전략이다.
⊙ 배수진의 전략적 함의
전투를 앞두고 배수진을 친 사례는 동서고금에 무수히 많다.
'정복왕' 노르망디공(公) 윌리엄은 1066년 영국을 정복할 때 후퇴수단인 함대를 불태웠다.
불과 11척의 함대와 700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멕시코를 정복한 스페인의 코르테즈 역시 10만명의 군대를 가진 아즈텍왕국의 몬테주마왕을 공격할 때(1521년) 함대 소각이란 전략을 재현했다.
수백 배에 달하는 상대방을 격퇴하기 위해 어떤 전략을 쓰는지는 영화 '300'에도 잘 드러나 있다.
병사들에게 죽음 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면 눈에 불을 켤 수밖에 없다.
이 같은 벼랑끝 전략은 '삼국지'를 보면 무수히 많다.
대개 숫적으로 열세일 때 다수의 적과 맞서려면 대개 성공했다.
북한의 핵을 이용한 전략도 이와 유사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처럼 배수진이 걸맞지 않은 상황에 배수진을 쳤다가 오히려 실패한 경우도 있다.
기업의 역사에도 배수진과 같은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1900년을 전후해 미국 정유시장의 95%를 독점한 스탠더드오일의 '약탈적 가격'(predatory pricing)이다.
가격을 원가 이하로 매우 낮게 책정해 경쟁기업들을 시장에서 몰아낸 뒤 다시 가격을 올려 손실을 회복하는 가격 정책을 뜻한다.
스탠더드오일은 당장 자신도 손해이지만 이를 감수하고 경쟁 상대가 망할 때까지 낮은 가격을 유지했다.
그러니 스탠더드오일에 맞설 경쟁자가 사라졌고,미국 대법원이 1911년 회사 분할을 명령할 때까지 독점을 누렸다.
스탠더드오일이 쪼개져 생긴 회사들이 엑슨모빌, 아모코 등 오늘날 미국의 정유사들이다.
⊙ 가수 토니 베넷의 전략적 행동
뉴욕타임스 1999년 5월2일자에는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그해 워너브라더스의 히트작 '애널라이즈 디스'의 대본에서 갱 두목(로버트 드 니로 扮)과 그의 정신과 의사(빌리 크리스털 扮)는 모두 미국 재즈 가수 토니 베넷의 열렬한 팬으로 나온다.
앞서 드 니로는 1997년 말 영화 제작 당시 한 파티장에서 이미 나이 70세에 가까운 베넷을 만나 영화에 출연해 달라고 요청했다.
영화사의 연락을 기다리던 베넷은 그 이후 1년 가까이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하다 뒤늦게 워너 측으로부터 노래 부르는 장면을 찍는 조건으로 1만5000달러를 제안 받았다.
이 때 워너 측은 영화 촬영이 거의 끝났다고 베넷 측에 알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칼자루는 워너가 아니라 베넷으로 넘어갔다.
결국 워너 측은 토니 베넷이 노래 부르는 대가로 20만달러를 지불해야 했다.(<버냉키·프랭크 경제학>에서 재인용)
워너 측이 전략적 행동을 할 줄 알았다면 베넷과 영화 촬영 전에 협상했어야 했다.
그때 베넷이 터무니 없는 가격을 불렀다면 대본을 수정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촬영을 다 끝냈음을 상대방이 아는 협상이라면 영화사로선 상대방이 부르는 대로 돈을 줄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영화를 완전히 새로 찍어야 할 테니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고, 장기의 외통수와 같은 상황이다.
⊙ 논술은 전략적 선택과 유사
논술 문제의 제시문들은 대개 딜레마적 상황으로 구성된다.
이상과 현실, 개인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 개발과 환경, 성장과 분배….
어느 한 쪽만 고집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양시론 양비론으로 갈 수도 없다.
인간 세상사가 끊임없는 딜레마 속에 선택 과정이기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동의할 정답도 없다.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대응전략을 찾는 전략적 선택에 대한 이해는 논술문제를 어떻게 접근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라면 나의 행동이 상대의 전략을, 상대의 행동이 내 전략을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편들 경우 위험부담이 생긴다.
그 위험을 극복하는 것이 전략적 선택인 셈이다.
딜레마 속에 좌충우돌하는 상황일수록 전략적 선택은 더욱 중요해진다.
물론 아무리 좋은 전략이라도 신빙성 있는(윌리엄과 코르테즈의 함대 소각과 같은) 행동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소용없겠지만….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장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