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에게 숭례문의 전소는 목조 문화재의 유실 그 이상의 무언가가 틀림없다.

불교계는 사람이 죽었을 때만 하는 49제를 숭례문을 위해 갖는다고 한다.

숭례문에 인격을 부여하는 것도 신기하지만 불교계의 반응도 묘하다.

숭유억불이 국가의 기조였던 조선시대에 스님들은 4대문 안 출입이 금지 되었었다.

숭례문은 스님들의 발걸음을 돌려세웠던 매몰찬 금법(禁法)의 상징이었다.

언론보도에서 남대문을 찾는 국민들의 조문행렬이 이어진다고 하자 눈치 빠른 어떤 할머니는 그 앞에 제사상을 차려 놓았다.

자신의 돈으로 준비한 제수 음식을 몇 가지 올려놓고 숭례문 문상객들로부터 돈을 받아 챙기다 걸렸다.

그런데 국민적 수준에서 조문객이 끊이지 않았다는 언론 보도에 비해 사기의 규모가 너무 작았다.

한나절 조문의 결과가 고작 16만원이었다.

할머니가 언론을 너무 믿었던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애도의 무게가 생각보다 가벼웠던 것일 수도 있다.

⊙ 미국 대선에 긴장하는 케냐인들
[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43) 숭례문과 국민의례
고고학자 로렌스 킬리는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수많은 사회에서 전쟁 때문에 죽은 남성의 비율을 표로 정리했다.

60%, 40%에 이르는 남아메리카나 뉴기니의 토착 부족과는 달리 20세기 미국과 유럽의 비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었다.

이 통계가 20세기 초의 두 차례 세계대전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스티븐 핑커,'빈서판')

원시 부족의 폭력성이 낮다고 평가해온 학자들은 비율을 계산하지 못한 단순한 실수를 범했던 셈이다.

50명의 집단에서 두 명의 남자가 폭력으로 사망한다는 건 5000만 명의 집단에서는 200만 명이 폭력으로 사망한다는 말이다.

아마존의 오와리 족의 언어에는 '먹을거리'를 뜻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는 오와리 족 이외의 사람들도 포함된다.

식인 풍습은 예외적이었다는 믿음이 일반적이다.

여러 문명권에서 식인은 오랫동안 금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그 반대를 말한다.

대부분 문명에서는 골수가 빠진 인간의 뼈가 발견되었다.

뼈를 쪼개 골수를 빼 먹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것은 식인 풍습이 아니라 사람을 먹는 것이 대다수 문명권에서 금기가 된 사연이다.

⊙ 추상적 공동체

어느 때부터 인류는 낯선 사람은 살해하거나 잡아먹는 게 최선의 전략이던 단계를 넘어서게 된 것이 확실하다.

그 계기가 무엇이었건 낯선 사람도 우리의 일부라는 공동체 의식의 확장과 관련 있다.

즉 낯선 집단들 간 적대 행위가 잦아들었다는 뜻이다.

싸움 대신 혼인이나 거래를 선택하면서 인류는 공동체의 규모를 거침없이 확장했다.

적대적이던 부족 간의 연합이 가능해지면서 국가라고 불러도 손색 없는 추상적인 개념이 들어선다.

일단 공동체의 개념이 추상화되고 나면 자신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하지 않는 한 길에서 마주친 낯선 사람에게 함부로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묵계가 작동한다.

그리고 이런 추상적 공동체의 규모가 큰 사회는 작은 사회에 비해 더 많은 이점을 누렸다.

공동체 내부의 평화적 교역은 원시사회의 안정성을 크게 향상시켰다.

작은 사회는 큰 사회에 흡수되면서 큰 사회는 더욱 그 영역을 넓혀 나갔다.

추상적 공동체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폭력은 삶의 일상으로부터 밀려나게 된다.

공동체 내부 구성원들 간의 분쟁을 구성원들끼리의 폭력적인 다툼으로 해결하는 경우는 점차 사라지고 공식적인 조직이 폭력을 독점하며 분쟁에 끼어들게 된다.

오와리 족 같은 예외가 아직도 지구상에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문명권에서 식인이 금기였다는 사실은 인류가 생각보다 오래 전부터 추상적인 공동체를 운영해왔다는 걸 웅변한다.

⊙ 고맙다! 숭례문

그런데 이 추상적인 공동체에도 맹점이 있다.

그 맹점은 이 공동체가 추상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추상적 공동체가 구성되었다고 해서 부족이나 씨족 간의 경쟁이 사라진 건 아니다.

국가는 추상적이지만 부족이나 가족은 그렇지 않다.

국가 공동체는 자칫하면 부족 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으로 파괴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추상적 공동체의 취약함이 오늘날이라고 해서 극복된 건 아니다.

케냐와 달리 부족 간의 갈등을 겪지 않는 우리는 국가가 어느 때보다 강한 세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국가는 생활의 터전인 동시에 경쟁과 갈등의 전쟁터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한국인들과 경쟁한다.

또 한국인 때문에 손해를 본다.

지역이나 이익 집단들 간의 치열한 다툼은 개개인 간 삶의 부대낌에서 빙산의 일각처럼 노출된 한 조각에 불과한지 모른다.

취학과 취업, 계약의 성취에서 경쟁자는 대체로 같은 한국인이며 사기 갈취 등 가해자 대부분도 같은 한국인이다.

국가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운 개개인은 눈에 선명하게 보인다.

일본과의 축구경기는 이 추상적 공동체의 아침 조회와 같다.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우리'를 경험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냉정해져도 좋아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알지만 흥분에 휩싸여 한 밤을 꼬박 지새우기도 한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냉정해질 마음이 조금도 없다.

숭례문의 상실도 그렇다.

비록 비극적인 일이긴 해도 이만큼 좋은 기회도 드물다.

몇 주 동안 언론은 같은 사건을 보도하고 국민들은 서로 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실 그 이상의 이득을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

만약 먼 타국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만난다면 비록 한국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낯선 사람이지만 축구나 숭례문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과 배경지식도 필요 없이 뜨겁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일이다.

그러나 국가라는 공동체는 이런 신기한 풍경을 지속적으로 연출하지 못하면 지속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왕이면 축구에 이긴다거나 노벨상을 받는 것 같이 경사스러운 일이라면 좋겠지만 누군가 역사를 왜곡해주기라도 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일인지 모른다.

이왕 벌어진 일이라면 숭례문 같은 사건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평생 한번 만나지도 못할 사람들과 한 물건을 잃은 슬픔을 공유한다.

이런 물건이 어디 흔하겠는가 말이다.

숭례문은 당당하게 서있을 때도 좋았지만 갈 때도 제몫을 해주었다.

고맙다!숭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