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샤펠 다리의 사연
1333년 세워진 샤펠 다리(Kapellbruecke)는 스위스 루체른의 명물이다.
관광객들은 밤이나 낮이나 아무런 제재 없이 203m에 이르는 이 다리를 직접 건너볼 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중앙에는 한때 교도소로 쓰였던 방이 있고, 다리 천정에는 122개의 그림이 붙어 있는데 17세기 루체른 지역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샤펠 다리는 하나의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문화 유물들의 전시장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샤펠 다리는 엄밀하게 따져 700년 된 문화재라 말하기 어렵다.
다리는 10여 차례 이상 부분적으로 보수되거나 교체됐다.
특히 1992년 화재는 다리를 거의 파괴했다.
80여점 이상의 그림이 소실되었다.
보험금과 기부금, 그리고 관광엽서 판매로 끌어 모은 200억원을 투입해 거의 새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샤펠 다리는 루체른 사람들의 자랑거리며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 목조건물은 불에 탄다
방송과 신문은 숭례문에 꽃을 바치며 '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꼬마들의 순진한 얼굴을 크로즈업했다.
아이들이야 미안할 게 없지만 아이들까지 미안해 할 만큼 어른들이 벌인 일이 어처구니없다는 메시지다.
아이들의 안타까운 표정만큼 어른들의 한심함을 더욱 극대화하는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수준에서 남대문이 지켜지는 건 아니다.
목조건물은 불에 잘 탄다.
목조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드문 가장 큰 이유다.
목재를 주요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중세 도시는 거의 100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었다는 추산이 있다.
물론 숭례문은 이런 통계를 뛰어넘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히 지켜야 하는 건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숭례문과 같이 몇 백 년을 뛰어 넘어 오늘에 이른 세계적인 목조 유산들은 상당히 예외적 사례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대가 조선의 임금이라면 자신이 살던 집과 도시를 지키는 성벽의 망루 중에서 어떤 걸 더 오래 보존하고 싶겠는가?
왕의 선택은 집이었겠지만 경복궁은 불에 탔고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그러니 조상님들의 특별한 노하우로 숭례문을 보존했다는 말은 조사(弔辭)로는 괜찮지만 설득력은 없는 듯하다.
숭례문은 특별히 운이 좋았다.
조상님들의 '특별한 살핌'이 있었다면 싸우지 않고 도성을 버린 은덕도 포함시켜야 정당할지 모른다.
샤펠 다리를 태운 관광대국 스위스도 불과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에 중세 길드 건물을 홀라당 태웠다.
650년이나 되는 이 건물에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많았다고 한다.
황당한 화재는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1992년 윈저궁이 불에 탔다.
방화가 아니라 보수 작업 중에 불꽃이 튀었다.
재산 피해는 1000억원 가까이 이른다.
실제 사용하는 왕궁이었기에 늦장 출동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노련한 방재 노력을 비웃고 불길은 삽시간에 천정으로 옮아갔다.
3분 안에 불길을 잡지 못하면 5분 내에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 화재라는 재난이다.
윈저궁 화재는 목조 문화재에 대한 방재 노력의 전환점이 됐다.많은 비용과 첨단장비가 유럽 전역의 목조 유산을 지키는 데 투입됐다.
그럼에도 화재로 인한 목조 유산의 유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비극이다.
영국은 석탄산업의 중요 유산인 던슨톤 석탄 부두(Dunston Coal Staithes)를 화마에 잃고 말았다.
2003년의 일이다.
⊙ 화재 진압이 유일한 관심이어야만 했을까?
숭례문의 소실이 특별이 속상한 이유 중 하나는 초기 진화가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방관들이 한창 진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까지도 숭례문은 겉보기에 멀쩡했다.
한마디로 자고 일어나니 국보 1호가 없어진 꼴이었다.
소방본부가 조기에 불길을 잡지 못한 것은 문화재청과의 의사소통에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보도도 있다.
완전한 진화를 위해서는 천정을 뜯어내야 할지 모른다는 소방본부의 문의에 문화재청 담당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냈다.
진화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실무자의 의견이 있고 얼마 후 담당국장은 될 수 있으면 파괴하지 말고 진화해 달라고 주문했다.
국장의 요청 때문에 소방본부는 불에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해석하는 분위기다.
결과를 놓고 보면 지붕이라도 뜯어서 완전히 진압하는 게 분명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숭례문의 붕괴)를 안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판단이다.
화재 진화를 무엇보다 우선해서 천장을 뜯고 불을 진압했다면 소방본부는 국민의 찬사를 받았을까?
국민은 그 선택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숭례문 전체를 허망하게 잃었을 거라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까?
문화재를 불필요하게 많이 훼손한 과잉진압이었다는 여론이 없었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미래를 모르는 상황에서의 판단이라면 소방본부의 조심스러움도, 문화재청의 갈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양궁에서는 표적의 중앙이 점수가 가장 높다.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점수가 낮아진다.
궁수는 중앙을 겨냥하면 된다.
중앙에 가까울수록 점수가 높기 때문이다.
정중앙이 10점 만점인데 바로 주위는 3점 감점, 그리고 외곽으로 갈수록 다시 점수가 서서히 올라가 테두리는 3점인 이상한 과녁을 생각해 보자.
궁수는 표적의 정중앙을 겨냥해야 할까?
현실에서는 정상적인 과녁보다 이상한 과녁이 더 일반적이다.
농구경기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3점차로 뒤지고 있는 팀의 공격이다.
남은 시간은 15초.
3점슛 한방이면 동점이다.
그러나 3점슛이 실패하면 경기를 잃게 된다.
안전하게 2점을 얻은 다음 공격권을 빼앗아 역전을 노리는 작전도 가능하다.
이때 3점슛은 큰 이익과 큰 위험을 동시에 떠안는 작전이다.
투아웃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4번 타자의 고민도 이와 비슷하다.
한 방이면 대량득점도 가능하지만 삼진아웃 위험이 있고 단타는 안전하긴 해도 많은 점수를 낼 수 없다.
영웅이 되는 길은 역적이 되는 길과 의외로 가깝다.
천장을 뜯어내고 초기에 진압하는 방법은 찬사도 얻기 어렵고 비난도 피하기 어렵다.
훼손 없이 불길을 잡는 섬세한 작전은 영웅이 되는 방법이긴 해도 모두가 아는 대로 참담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안전만이 유일한 관심은 아니다
화재로부터 목조 유산을 지킨다는 유럽의 스프링클러들은 민감도가 고민이다.
지나치게 민감하면 위험하지 않은 연기나 열에도 반응하는데 이때 나오는 물이나 가스는 문화재를 어느 정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둔감하면 큰 불로 번지기 전에 통제한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적당한' 민감도가 답이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도 그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안전만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은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비교적 적은 비용만으로도 초기 안전도는 현저히 올라간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 안전도를 추가로 높이는 데는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어떤 기술이 1000분의 1만큼의 안전도를 향상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기술을 구입하거나 설치하는 비용이 수십억원에 이른다면 따져 봐야 한다.
지금과 같이 냉정하지 못한 여론은 무조건 안전할수록 좋다는 압력을 가한다.
효과도 별로 보지 못하면서 돈만 투입하는 결과면 그나마 다행이다.
스프링클러의 민감도를 최대치로 올려놓게 되면 수시로 물을 뿌려 귀중한 색감이 녹아 없어진다.
이제 문화재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이 무조건 천장을 뜯어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지 모른다.
안전만이 우선한다면 이런 고민 자체가 필요없다.
흥인지문부터 뜯어서 박물관 지하창고에 보관하면 된다.
귀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이 아니라 거리에 놔두는 자체가 안전말고도 따져야 할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걸 웅변한다.
샤펠 다리는 담뱃불 때문에 전소되었다.
안전만이 우선이라면 담뱃불도, 관광객도 엄금해야 한다.
그러나 샤펠 다리 위에서는 지금도 관광객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이번 숭례문 전소는 기술이나 관리의 한계영역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조직적이지도, 그다지 치밀하지도 않은 방화에 허망하게 노출되었다.
그러나 목조문화재의 전소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절규는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을 호도한다.
화재에 의한 목조 유산의 소실은 있을 수 있으며 종종 있는 일이다.
목조는 불에 탈 수 있다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냉정한 인식은 과학적인 방재 노력의 전제다.
문화재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면 그들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언론이 만든 가짜 신화가 아니라 그들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과학적 자세여야 한다.
1333년 세워진 샤펠 다리(Kapellbruecke)는 스위스 루체른의 명물이다.
관광객들은 밤이나 낮이나 아무런 제재 없이 203m에 이르는 이 다리를 직접 건너볼 수 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 중앙에는 한때 교도소로 쓰였던 방이 있고, 다리 천정에는 122개의 그림이 붙어 있는데 17세기 루체른 지역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샤펠 다리는 하나의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문화 유물들의 전시장이기도 한 셈이다.
그러나 지금의 샤펠 다리는 엄밀하게 따져 700년 된 문화재라 말하기 어렵다.
다리는 10여 차례 이상 부분적으로 보수되거나 교체됐다.
특히 1992년 화재는 다리를 거의 파괴했다.
80여점 이상의 그림이 소실되었다.
보험금과 기부금, 그리고 관광엽서 판매로 끌어 모은 200억원을 투입해 거의 새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샤펠 다리는 루체른 사람들의 자랑거리며 관광객들에게 사랑받는 명소다.
⊙ 목조건물은 불에 탄다
방송과 신문은 숭례문에 꽃을 바치며 '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꼬마들의 순진한 얼굴을 크로즈업했다.
아이들이야 미안할 게 없지만 아이들까지 미안해 할 만큼 어른들이 벌인 일이 어처구니없다는 메시지다.
아이들의 안타까운 표정만큼 어른들의 한심함을 더욱 극대화하는 이미지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수준에서 남대문이 지켜지는 건 아니다.
목조건물은 불에 잘 탄다.
목조 문화재가 세계적으로 드문 가장 큰 이유다.
목재를 주요 건축 자재로 사용하는 중세 도시는 거의 100년마다 완전히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었다는 추산이 있다.
물론 숭례문은 이런 통계를 뛰어넘었다.
그래서 더욱 소중히 지켜야 하는 건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숭례문과 같이 몇 백 년을 뛰어 넘어 오늘에 이른 세계적인 목조 유산들은 상당히 예외적 사례라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그대가 조선의 임금이라면 자신이 살던 집과 도시를 지키는 성벽의 망루 중에서 어떤 걸 더 오래 보존하고 싶겠는가?
왕의 선택은 집이었겠지만 경복궁은 불에 탔고 숭례문은 살아남았다.
그러니 조상님들의 특별한 노하우로 숭례문을 보존했다는 말은 조사(弔辭)로는 괜찮지만 설득력은 없는 듯하다.
숭례문은 특별히 운이 좋았다.
조상님들의 '특별한 살핌'이 있었다면 싸우지 않고 도성을 버린 은덕도 포함시켜야 정당할지 모른다.
샤펠 다리를 태운 관광대국 스위스도 불과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에 중세 길드 건물을 홀라당 태웠다.
650년이나 되는 이 건물에는 귀중한 역사자료가 많았다고 한다.
황당한 화재는 영국도 예외는 아니다.
1992년 윈저궁이 불에 탔다.
방화가 아니라 보수 작업 중에 불꽃이 튀었다.
재산 피해는 1000억원 가까이 이른다.
실제 사용하는 왕궁이었기에 늦장 출동 같은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노련한 방재 노력을 비웃고 불길은 삽시간에 천정으로 옮아갔다.
3분 안에 불길을 잡지 못하면 5분 내에 회복 불능의 피해를 입히는 것이 화재라는 재난이다.
윈저궁 화재는 목조 문화재에 대한 방재 노력의 전환점이 됐다.많은 비용과 첨단장비가 유럽 전역의 목조 유산을 지키는 데 투입됐다.
그럼에도 화재로 인한 목조 유산의 유실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비극이다.
영국은 석탄산업의 중요 유산인 던슨톤 석탄 부두(Dunston Coal Staithes)를 화마에 잃고 말았다.
2003년의 일이다.
⊙ 화재 진압이 유일한 관심이어야만 했을까?
숭례문의 소실이 특별이 속상한 이유 중 하나는 초기 진화가 충분히 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방관들이 한창 진화 작업을 시작하고 있을 무렵까지도 숭례문은 겉보기에 멀쩡했다.
한마디로 자고 일어나니 국보 1호가 없어진 꼴이었다.
소방본부가 조기에 불길을 잡지 못한 것은 문화재청과의 의사소통에 혼선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보도도 있다.
완전한 진화를 위해서는 천정을 뜯어내야 할지 모른다는 소방본부의 문의에 문화재청 담당자들은 서로 다른 의견을 냈다.
진화가 무엇보다 우선한다는 실무자의 의견이 있고 얼마 후 담당국장은 될 수 있으면 파괴하지 말고 진화해 달라고 주문했다.
국장의 요청 때문에 소방본부는 불에 기선을 빼앗기고 말았다고 해석하는 분위기다.
결과를 놓고 보면 지붕이라도 뜯어서 완전히 진압하는 게 분명 나은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과(숭례문의 붕괴)를 안다는 전제에서 가능한 판단이다.
화재 진화를 무엇보다 우선해서 천장을 뜯고 불을 진압했다면 소방본부는 국민의 찬사를 받았을까?
국민은 그 선택이 아니었으면 지금처럼 숭례문 전체를 허망하게 잃었을 거라는 현장 지휘관의 판단을 곧이 곧대로 믿어줄까?
문화재를 불필요하게 많이 훼손한 과잉진압이었다는 여론이 없었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미래를 모르는 상황에서의 판단이라면 소방본부의 조심스러움도, 문화재청의 갈등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양궁에서는 표적의 중앙이 점수가 가장 높다.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점수가 낮아진다.
궁수는 중앙을 겨냥하면 된다.
중앙에 가까울수록 점수가 높기 때문이다.
정중앙이 10점 만점인데 바로 주위는 3점 감점, 그리고 외곽으로 갈수록 다시 점수가 서서히 올라가 테두리는 3점인 이상한 과녁을 생각해 보자.
궁수는 표적의 정중앙을 겨냥해야 할까?
현실에서는 정상적인 과녁보다 이상한 과녁이 더 일반적이다.
농구경기를 예로 들면 이해가 쉽다.
3점차로 뒤지고 있는 팀의 공격이다.
남은 시간은 15초.
3점슛 한방이면 동점이다.
그러나 3점슛이 실패하면 경기를 잃게 된다.
안전하게 2점을 얻은 다음 공격권을 빼앗아 역전을 노리는 작전도 가능하다.
이때 3점슛은 큰 이익과 큰 위험을 동시에 떠안는 작전이다.
투아웃 만루에서 타석에 들어선 4번 타자의 고민도 이와 비슷하다.
한 방이면 대량득점도 가능하지만 삼진아웃 위험이 있고 단타는 안전하긴 해도 많은 점수를 낼 수 없다.
영웅이 되는 길은 역적이 되는 길과 의외로 가깝다.
천장을 뜯어내고 초기에 진압하는 방법은 찬사도 얻기 어렵고 비난도 피하기 어렵다.
훼손 없이 불길을 잡는 섬세한 작전은 영웅이 되는 방법이긴 해도 모두가 아는 대로 참담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안전만이 유일한 관심은 아니다
화재로부터 목조 유산을 지킨다는 유럽의 스프링클러들은 민감도가 고민이다.
지나치게 민감하면 위험하지 않은 연기나 열에도 반응하는데 이때 나오는 물이나 가스는 문화재를 어느 정도 훼손할 수밖에 없다.
지나치게 둔감하면 큰 불로 번지기 전에 통제한다는 애초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적당한' 민감도가 답이지만 현실에서는 누구도 그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안전만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다른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여론은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비교적 적은 비용만으로도 초기 안전도는 현저히 올라간다.
그러나 어느 정도 수준을 넘어 안전도를 추가로 높이는 데는 엄청난 비용을 쏟아 부어야 한다.
어떤 기술이 1000분의 1만큼의 안전도를 향상한다면 물론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 기술을 구입하거나 설치하는 비용이 수십억원에 이른다면 따져 봐야 한다.
지금과 같이 냉정하지 못한 여론은 무조건 안전할수록 좋다는 압력을 가한다.
효과도 별로 보지 못하면서 돈만 투입하는 결과면 그나마 다행이다.
스프링클러의 민감도를 최대치로 올려놓게 되면 수시로 물을 뿌려 귀중한 색감이 녹아 없어진다.
이제 문화재 화재를 진압하는 소방관들이 무조건 천장을 뜯어낸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지 모른다.
안전만이 우선한다면 이런 고민 자체가 필요없다.
흥인지문부터 뜯어서 박물관 지하창고에 보관하면 된다.
귀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이 아니라 거리에 놔두는 자체가 안전말고도 따져야 할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걸 웅변한다.
샤펠 다리는 담뱃불 때문에 전소되었다.
안전만이 우선이라면 담뱃불도, 관광객도 엄금해야 한다.
그러나 샤펠 다리 위에서는 지금도 관광객들이 담배를 피울 수 있다.
이번 숭례문 전소는 기술이나 관리의 한계영역에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조직적이지도, 그다지 치밀하지도 않은 방화에 허망하게 노출되었다.
그러나 목조문화재의 전소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절규는 진정성에도 불구하고 본질을 호도한다.
화재에 의한 목조 유산의 소실은 있을 수 있으며 종종 있는 일이다.
목조는 불에 탈 수 있다는 다소 비관적이지만 냉정한 인식은 과학적인 방재 노력의 전제다.
문화재 선진국으로부터 배울 게 있다면 그들은 실수하지 않는다는 언론이 만든 가짜 신화가 아니라 그들의 냉정한 현실인식과 과학적 자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