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빚 독촉에 시달리다 결국 집을 빚쟁이에게 넘기고 말았다."

"그는 사업에 실패해 빚쟁이가 돼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됐다."

흔하지는 않지만 우리말에서 한 단어가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빚쟁이'가 바로 그런 경우다.

'빚쟁이'란 본래 '남에게 돈을 빌려 준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첫 문장에 쓰인 '빚쟁이'가 그것이다.

그런데 둘째 문장에 보이는 '빚쟁이'는 좀 다르다.

여기서는 '빚쟁이'가 '빚을 진 사람'으로 쓰였다.

본래 '빚을 진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은 '빚꾸러기'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빚꾸러기는 잊고 돈을 빌려 준 사람이든, 빌려 쓴 사람이든 통틀어 빚쟁이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은 오히려 '빚쟁이를 빚을 진 사람'으로 더 많이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사전에도 이를 감안해 빚쟁이의 풀이에 두 가지를 다 올려놓았다.

이는 '빚쟁이'란 말의 의미 확장이 언중에 의해 이미 광범위하게 뿌리 내렸다고 보고 사전에서 수용한 결과다.

하지만 지금도 '빚꾸러기'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시대에 따라 단어가 의미 변화를 겪는 것은 언어의 한 속성이긴 하지만 그 경우에도 말의 과학적인 사용이란 측면에서 이 같은 태도는 그리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한명숙 총리 피지명자 인사청문회와 관련해 17일과 18일에 인사청문회를 하고…, 한 피지명자의 당적정리 문제는 인사청문회에서…."

2006년 4월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기자브리핑에서 '피지명자'란 말을 썼다.

이는 전회에서 살폈듯이 대부분의 언론에서 쓰던 '한명숙 총리 지명자'와 대비되는 표현이다.

'피(被)-'는 일부 명사 앞에 붙어 '그것을 당함'이란 뜻을 더하는 접두사이다.

우리말에는 어떤 단어 앞에 '피(被)'를 붙임으로써 피동의 뜻을 나타내는 용법이 있다.

'피보험자, 피선거권, 피정복자'처럼 쓰인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지배자였고 우리 민족은 피지배자였다.

마찬가지로 '지명받는 자'는 정확히 말하면 '피지명자'이다.

물론 현실 언어에서 이 말의 실효성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있지만, 전부터 써오던 말이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람들의 인식에서 주체와 객체 간 구별이 흐려져 지명받는 사람에게까지 '피-'가 떨어져 나간 말로 쓰는 것 같다.

이는 말을 논리적,객관적으로 쓰지 않고 대충 편하게 쓰려고 하는 일부 사회 언어적 분위기 탓이 큰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말을 마음대로 비틀고 바꿔 쓰는 게 특징인 '사용자 중심'의 통신언어, 인터넷언어의 확산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내정자'나 '해고자' 같은 말도 '내정된 자' '해고된 자'의 뜻을 가지려면 이치적으로는 '피-'를 붙여 써야 하지만 실제 언어생활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지명자와 함께 이런 말들은 아직 단어로서의 지위를 얻지 못해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의미 이동의 과정에 있는 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놓치면 안 되는 것은 이처럼 개념을 모호하게 하는 쪽으로의 언어 변화는 결코 과학적 언어 양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