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민의 마중물 논술] (37) 총기난사를 둘러싼 억측들
⊙ 조승희 사건을 보는 눈

벌써 잊혀졌지만 아직 1년도 지나지 않았다.

명백한 정신질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한 청년 때문에 32명의 목숨이 스러졌다.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 말이다.

예전에도 정신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들이 휘두른 총에 의해 벌어진 끔찍한 사건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버지니아공대 총격사건을 대하는 한국인들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건의 주인공이 한국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주미 한국대사가 공식 사과한 일을 놓고 적절한 행동이었는지를 따져 묻는 소란도 있었지만,당시 대다수 한국인들은 어떤 형태로건 미안함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가해자 조승희의 추모비까지 만들어 놓고 '그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우리 문제의 한 부분이다'고 말하는 미국인들에게 감동받아 쓴 이해인 수녀의 시가 일간지에 실리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와 달리 문제의 원인을 미국의 총기문화라고 지적하는 여론도 있었다.

이런 주장을 폈던 언론들의 예측 하나는 크게 엇나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총기 소지에 대한 미국 내 정치적 논쟁이 가열될 것이라고 봤지만 1년간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이제 막 시작한 미국에서 총기 소지가 사회 쟁점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는다.

버지니아공대 사건을 총기문제로 보는 시각이 미국에 없다는 말도 아니고 총기 소지가 미국 대선 쟁점의 하나가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총기 소지는 미국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는 쟁점이다.

그럼에도 버지니아공대 사건이 총기에 관대하거나 무관심한 국민에게 충격을 주어 총기문제에 대한 관심을 촉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 총 때문에

2005년 미국에서 발생한 1만4860건의 살인사건 중 68%가 총기에 의한 것이다.

매일 28명이 총에 맞아 죽는 셈이다.

강도사건의 78.8%와 성폭행의 48.7%가 총기를 범죄의 도구로 사용했다.

문제는 간단하다.

총을 없애면 되지 않을까?

광신적인 총기 옹호론자가 아니더라도 총기문제를 제기하며 들이대는 이 숫자들은 지나치다고 느끼게 된다.

논리를 확장하면 이렇다.

살인사건 중 68%와 강도사건의 80%,그리고 성폭행의 50%는 총기 소지가 억제되었다면 발생하지 말았어야 할 비극이다.

과연 그럴까?

총기는 도구다.

범죄는 사람이 저지른다.

총기가 없더라도 다양한 흉기가 범죄에 동원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런 숫자들을 제시하며 총기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도구가 범죄를 만든다는 상식에 어긋난 전제에 어느 정도 기초하게 되는 셈이다.

이런 숫자들이 자극적이긴 해도 논거로 사용할 수는 없다.

총은 보통의 도구가 아니다.

특별하다.

총이 아닌 칼로 어떻게 32명을 일시에 죽일 수 있었겠느냐고 부연할 수 있지만 이 역시 감정적이다.

칼까지도 필요없다.

기름 한 통으로 200여명을 죽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2002년 대구 지하철 방화사건의 범인은 기름 한 통으로 시민 198명을 살해하고 147명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혔다).

총기소지율과 관련된 통계를 따져볼 수 있다.

총기 소지가 자유로운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서 폭력사건의 빈도가 높을까?

총기소지율이 낮은 영국과 캐나다는 총기소지율이 높은 미국보다 강력범죄가 세 배나 많다.

이스라엘 핀란드 스위스 같은 나라는 총기소지율이 매우 높지만 폭력 범죄는 드물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는 반대의 경향도 보인다.

다시 말해 총기소지율과 각국의 폭력범죄율 간에는 일관성 있는 상관관계를 관찰하기 어렵다.

총기를 옹호하는 측은 총 때문에 오히려 범죄가 억제된다고 말하고,총기를 반대하는 이들은 총 때문에 사소한 폭력으로 끝날 부부싸움이 살인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만 통계는 이런 주장을 입증할 만한 일관성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 일반인이 총기를 소지해야 난사도 막을 수 있다는 주장

총이 도구로 쓰인 여러 범죄의 원인이 총기가 아니라는 주장,즉 총이 없더라도 동일한 범죄는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은 그런대로 납득할 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정신질환자들이 총기를 가질 수 없다면 버지니아공대 사건 같은 비극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곤 하는 난사사건은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오직 총이 옆에 있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차별 난사라는 특성상 불특정 다수가 총기를 휴대하고 있어야만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진지하게 제기되기도 한다.

존 롯 예일대 교수는 총기 소지가 오히려 이런 난사사건을 줄인다고 주장한다.

교실에서 학생이나 교수 한두 명이 총을 휴대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조승희라도 그런 담대한 범행을 기획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이다.

롯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통계를 사용했다.

총기 소지가 완화된 시점을 기준으로 난사사건에 의한 사망률을 조사했다.

총기 소지를 완화한 주(州)가 그렇지 않은 주보다 난사사건에 의한 사망률이 조금 낮았다.

그 비율은 연간 100만명당 0.37 대 0.41명이다.

눈치챘겠지만 이 차이는 너무 작다.

1억명당 41명이냐 37명이냐를 놓고 총기 소지 법률의 영향을 따지기 어렵다.

총기나 법률이 아닌 알 수 없는 다른 요인이 이런 미세한 차이를 만들었을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우연일 가능성이 크다.

버지니아공대 사건 같은 일은 잊을 만하면 일어나지만 10년에 한 번 일어날 수도 있고 1년에 두 차례 발생할 수도 있다.

10년 동안 이런 사건이 없었다고 해서 다시는 없다고 보장할 수 없겠지만 무사고 10년째 측정한 통계는 매우 경이롭게 보인다.

수치상으로는 사고율이 '0'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 한 번만 발생해도 1년 만에 몇 백%나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로버트 에를리히 '9가지 크레이지 아이디어')

⊙ 총기사건은 정말 사회문제일까?

금품이나 원한 등 어떤 목적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벌이는 난사사건은 충격적이다.

언론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총기 소지는 그때마다 도마에 오른다.

그러나 총기난사는 사건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과한 대접을 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연간 5000명당 1명 꼴로 자동차 사고로 죽지만 총기난사로는 200만명당 1명이 죽는 정도다.

집 안에 있는 수영장에서 아이가 익사 사고를 당할 확률은 1만1000분의 1이다.

한편 총으로 인한 사고로 아이가 목숨을 잃을 확률은 100만분의 1 미만이다.

수영장이 있는 친구 집에서 아이가 불행한 사고를 당할 확률이 총이 있는 집보다 무려 100배나 더 크다.

그래도 부모들은 수영장이 있는 집에 아이를 보낼지언정 서랍 속에 총기를 숨긴 집에 자녀를 편한 마음으로 보내지 않는다.

(스티븐 레빗·스티븐 더브너 '괴짜경제학')

숫자만으로는 자동차가 총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임에 틀림없다.

수영장이 총보다 해롭다.

그러나 자동차나 수영장은 안 타고 안 가면 그만이다.

같은 반 친구가 연발소총을 들고 나타나는 일은 예상할 수도,막을 수도 없다.

합리적인 이유가 없기에 정책을 통해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이 총기난사 사건을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한다는 설명도 가능하다.

단 한 명도 소중한 생명이라고 반박하고 싶겠지만 곤충에 물려서 사망한 사람이나 웅덩이에 빠져 죽는 사람도 이보다 많다고 한다.

자극적인 사건이라고 해서 모두 사회문제라 할 수는 없다.

한 사건을 사회문제로 삼아 정책적 대안을 만들기 위해 심각하게 고려하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는 것 이상이 필요하다.

⊙ 또 다른 뻔한 분석들

미국 이민문화를 조승희사건의 배경으로 지적한 분석도 있었다.

이 역시 별다른 의미가 없다.

미국은 이민사회다.

그 수많은 이민자들이 모두 잘 적응하는 건 아니겠지만 모두 조승희 같이 반응하지도 않는다.

조승희사건을 계기로 미국 이민자들에게 새로운 관심을 쏟을 수 있지만 그런 관심과 이 관심에서 비롯된 어떤 정책이 제2의 조승희 사건을 막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범죄를 일으킨 사람이 이민자지만 이민자의 문제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 접근으로 막을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분노를 쏟아낸 일기나 시를 보고 손을 썼다면 막을 수 있었다는 아쉬움도 단지 안타까움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기나 숙제에 엽기적인 내용을 적는 학생이 1년에 몇 명이나 될까?

그들 모두를 잠재적인 사회 부적응자나 살인자로 예단하고 관리하는 게 과연 말이 되는 소릴까?

이를 위해 진지한 시스템이라도 만든다면 그 자체가 매우 끔찍한 비극이다.

장난삼아 끄적인 레포트 때문에 며칠 동안 심문을 당한다고 상상해 보라.

조승희사건은 수백 수천만의 하나라는 확률적으로는 매우 작은 수다.

이 작은 수가 사건에 많은 성격을 부여한다.

조승희가 사용한 도구나 그의 신분,그의 성격을 일반화하여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에서 특별한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분석으로 사건의 재발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명은 아직 수백만분의 1의 확률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원천적으로 방지할 만큼 정교하지 못하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인간의 지각이 그렇게까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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