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비용과 측정비용

[경제를 알면 논술이 술술] 22. 왜 수박을 낱개가 아니라 쪼개서 포장해 팔까?
할인점·슈퍼마켓 등의 식품매장에선 수박이나 배추를 반으로 쪼개 비닐 랩으로 포장한 뒤 무게를 달아 판다.

왜 멀쩡한 채소나 과일을 낱개로 팔지 않고 쪼개서 팔까.

이렇게 팔면 무슨 이득이 있을까.

또한 출판사는 저자와 인세를 계약할 때 고정액이 아니라 일정 비율로 계약한다.

저자의 인지도나 책의 완성도에 따른 인세 차별은 극히 미미하다.

심지어 유명 화가의 그림은 예술성에 관계없이 '호(號≒엽서 크기)당 얼마'식으로 가격을 매긴다.

농산물이든,문학·예술작품이든 품질이나 가치면에서 차이가 클텐데 왜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사고팔거나 계약을 맺을까.

이는 거래비용(특히 측정비용)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측정비용을 더 들인다고 해서 제품 가치가 올라가는 것이 아니므로 이런 투자는 낭비이기 때문이다.

거래비용과 측정비용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자.

⊙ 배추를 쪼개 파는 이유

배추를 포기 단위로만 판다면 소비자들은 이것저것 들춰보고 눌러보고 나서 크고 좋은 것만 사갈 것이다.

손때를 탄 배추는 팔기 어려워진다.

수박도 잘 익었는지 알려면 일부를 베어내 보여줘야 하는데,소비자가 마음에 안 들어하면 다시 팔 수 없다.

이렇게 못 팔게 된 배추와 수박은 그 자체가 좋은 채소와 과일을 감별하는데 들어가는 측정비용인 셈이다.

이런 비용을 없애기 위해 할인점 등에선 배추,수박을 절반으로 쪼개 포장한 뒤 무게에 따라 값을 매겨 판다.

그러면 곧바로 잘 익었는지 보여줄 수 있고 작은 것도 가격을 낮춰 팔면 되므로 일석이조다.

출판사가 작가와 판권계약을 할 때 대개 인세를 고정 금액(先인세)이 아닌 판매량 대비 일정 비율(책값의 10% 안팎)로 계약한다.

책이 잘 팔릴수록 인세가 커지지만,책이 안 팔렸을 때 생기는 위험부담도 예방할 수 있다.

잘 팔릴 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려면 관련 전문가의 평가를 받는 것 자체가 측정비용이다.

미술상이 호당 얼마씩 매겨 그림을 파는 것은,특정 화가의 작품 가운데서도 걸작과 졸작이 뒤섞여 있는데 이를 무시한 원시적 방법이라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비평가에게 맡길 때 드는 측정비용을 제거하고 가격체계를 단순화하기 위한 방편이란 점에선 긍정적인 면도 있다.

⊙ 배보다 배꼽이 더 크지 않아야

상품을 사고 팔 때 드는 돈은 가격만이 아니다.

거래 당사자들이 합의에 이르고,그 합의를 이행하도록 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이처럼 거래에 수반되는 일체의 비용을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이라고 부른다.

상품의 가격과는 구분된다.

거래비용은 단계별로 탐색비용,측정비용,집행비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탐색비용(searching cost)은 거래 전에 판매자가 소비자를,소비자가 판매자를 찾는데 드는 정보수집 비용이다.

측정비용(cost of measurement)은 거래 대상인 상품·용역의 특징을 정확히 측정·감정·감별·평가하는데 드는 비용을 뜻한다.

집행비용(cost of enforcing)은 거래 이후 단계에서 계약이행을 강제하기 위한 것.계약이 준수되는지 감시하거나,계약이 깨졌을 때 위약금을 받아내기 위해 변호사를 고용한다든지 할 때 드는 비용을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물건값은 깎으려고 애쓰면서도 막상 거래비용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아무리 물건값이 싸다고 해도 그곳을 찾아가는데 드는 교통비와 시간,품질을 확인할 수 있는지,나중에 환불이 가능한지 여부 등도 중요한 변수가 된다.

아예 '땡처리' 가격이면서 "교환불가,환불불가"를 외친다면 모를까.

할인된 금액보다 거래비용이 더 크면 그 거래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지,어디까지가 배꼽인지 잘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 기업은 거래비용 절감 위해 등장한 조직

거래비용은 영국 경제학자 로널드 코즈는 1937년 '기업의 본질'이란 논문에서 "기업은 제품·서비스를 생산해 팔고 유통하는데 반복적으로 드는 비용(거래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조직된다"며 처음 사용한 개념이다.

개인들이 시장에서 1 대 1로 거래할 때보다 기업을 조직하고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이 더 쌀 때 기업이 생겨난다는 얘기다.

또한 기업이 커져도 무한히 확장하지 않고 경계가 설정되는 것 역시 거래비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기업이 특정 업무를 내부조직으로 두는 비용보다 시장에 맡기는 비용이 더 저렴하다면 그 업무를 위해 굳이 기업이 조직을 확장할 이유가 없다.

기업의 핵심역량과 아웃소싱이 분리되는 요인도 거래비용에 있는 셈이다.

코즈는 이를 토대로 1960년대 시카고대 교수 시절 공해 등 외부효과 문제를 해결하는 이론적 근거가 된 '코즈의 법칙'을 제시했고,노벨 경제학상(1991년)까지 수상하며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낭비로 인한 비효율을 극소화한다는 점에서 현대 경제학에선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로 부각됐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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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으면 말고' … 드비어스社의 독특한 다이아몬드 판매방식

[경제를 알면 논술이 술술] 22. 왜 수박을 낱개가 아니라 쪼개서 포장해 팔까?
"Take it or leave it!"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공급업체인 드비어스(De Beers·현재는 DTC)의 독특한 다이아몬드 판매방식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사가든지,싫으면 놔둬라"라는 의미다.

'다이아몬드는 영원히'란 광고문구로 유명한 드비어스는 희한하게도 다이아몬드를 가공하지 않은 원석 상태로 판다.

드비어스는 런던에 위치한 중앙판매기구(CSO)를 통해 세계의 천연 다이아몬드를 수집하고 이를 5000여가지의 등급으로 세분화해 등급·크기별 견본을 구비한다.

도매상,가공업체 등 고객의 주문을 받으면 그 주문 내용과 유사한 견본을 정찰제 가격으로 제시한다.

고객이 그 가격에 견본을 구매하면 그대로 거래가 성립되고 구매하지 않으면 앞으로 거래를 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를 통해 드비어스는 판매단계마다 감정사가 다이아몬드를 감정해 생기는 비용(측정비용)을 제거했다.

구매자와의 가격협상에 따른 협상비용도 들지 않는다.

설사 감정사를 통해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더라도 이보다 더 나은 다이아몬드를 구할 수 없다면 구매자도 굳이 구매단계에서 감정비용을 들일 이유가 없다.

드비어스는 감정에 드는 비용을 줄임으로써 자신은 물론 구매자도 만족할 수 있는 방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만약 드비어스가 자신의 이익만 고집했다면 이 같은 거래는 지속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처럼 '싫으면 말고'식 판매전략이 통했던 것은 드비어스가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 공급의 80%를 점유하고 있고, 브랜드 자체가 품질보증 기능까지 가졌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를 감정하는 비용을 들인다고 해서 다이아몬드 자체의 가치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면 이런 측정비용을 아예 제거하는 게 서로에게 효율적이란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