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새떼가 마주보고 날아서,곧장 맞부닥뜨려서,부리를,이마를,가슴뼈를,죽지를,부딪친다고 쓴다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살점 하나,잔뼈 한 조각,날갯짓 한 개,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빈 몸들끼리 뚫렸다고,그러므로 空中이라고 쓴다.
- 위선환의 시,'새떼를 베끼다' 중에서
공원의 비둘기 떼들이나,가을의 철새들이 어떻게 접촉사고 한 번 내지 않고 하늘에서 공존하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무리지어 일순간에 하늘로 날아 오르는 그 어지러운 광경을 보면서 새떼들이 질서 있게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새떼들이 접촉사고를 내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위 시는 이런 의문을 풀어 주었다.
새떼들이 서로를 관통할 듯 마주보고 날아 오고 있다.
마치 두 대의 자동차가 양 방향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듯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위기의 순간이다.
그러나 새때들의 충돌은 찬란하다.
한 조각의 살점과 깃털 하나도 남기지 않은 완전한 관통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시인은 하늘처럼 새떼들도 空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논술을 쓸 때도 우리는 저 새떼들처럼 空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空하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무뇌의 상태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관념이나 통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역사는 주관적이라는 통념,웃음은 항상 긍정적이라는 관념을 벗어날 때,우리는 제대로 관통할 수 있다.'
논술로 대입 수시에 합격한 학생들 중에는 믿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합격했을까?
수업시간에 삐딱한 시선으로 따지는 듯한 말투로 늘 비아냥 거렸던 아이였는데….
그러나 그 학생은 표현과 행동 방식만 삐딱했었다.
학생은 남들이 웃음을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만 생각할 때,오히려 웃음이 공격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도전이고 반항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조소와 풍자라는 웃음을 활용한 공격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웃으면 복이 온다는 긍정적인 명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다보니,웃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관통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비워보자.
그러면 새로운 사실을 관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이 긍정적이기만 하다는 생각을 비울 때,새로운 생각이 관통할 수 있다.
미래 사회에는 부모 면허가 나온다는 글을 읽는다.
아이들 모두가 뜨악해 하면서도 한편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보험금을 타낼 수단으로 여기는 현실이 더 심화되는 요즘 필요악으로 그런 면허가 나올 만하다는 것을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화두를 두고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부모 면허가 필요하다,필요없다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우리의 머리를 일순간에 비우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운전면허도 면허증을 따기 이전에 교육부터 하지 않느냐?
교육을 시키지 않고,면허증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맞다.
면허증의 필요 여부로만 머릿속이 꽉 차 있을 때,부모 교육이 선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의 생각을 통쾌하게 비워주었다.
논술을 쓸 때 승부로만 머리를 채우지 말자.승부를 초월해서 욕심과 생각을 비우자.
통념을 버린 무뇌아로 다시 태어나 보자.
그렇게 해야 제3의 초월적 견해가 영감처럼 들어오지 않을까?
맞부딪친 새들끼리 관통해서 새가 새에게 뚫린다고 쓴다
새떼는 새떼끼리 관통한다고 쓴다 이미 뚫고 나갔다고,날아가는 새떼끼리는 서로 돌아본다고 쓴다
새도 새떼도 고스란하다고,구멍 난 새 한 마리 없고,살점 하나,잔뼈 한 조각,날갯짓 한 개,떨어지지 않았다고 쓴다
공중에서는 새의 몸이 빈다고,새떼도 큰 몸이 빈다고,빈 몸들끼리 뚫렸다고,그러므로 空中이라고 쓴다.
- 위선환의 시,'새떼를 베끼다' 중에서
공원의 비둘기 떼들이나,가을의 철새들이 어떻게 접촉사고 한 번 내지 않고 하늘에서 공존하는지 의문을 품은 적이 있었다.
무리지어 일순간에 하늘로 날아 오르는 그 어지러운 광경을 보면서 새떼들이 질서 있게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새떼들이 접촉사고를 내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인가? 위 시는 이런 의문을 풀어 주었다.
새떼들이 서로를 관통할 듯 마주보고 날아 오고 있다.
마치 두 대의 자동차가 양 방향에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듯이. 긴장감이 최고조에 다다른 위기의 순간이다.
그러나 새때들의 충돌은 찬란하다.
한 조각의 살점과 깃털 하나도 남기지 않은 완전한 관통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시인은 하늘처럼 새떼들도 空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논술을 쓸 때도 우리는 저 새떼들처럼 空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空하라고 해서 생각이 없는 무뇌의 상태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관념이나 통념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역사는 주관적이라는 통념,웃음은 항상 긍정적이라는 관념을 벗어날 때,우리는 제대로 관통할 수 있다.'
논술로 대입 수시에 합격한 학생들 중에는 믿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저런 아이가 합격했을까?
수업시간에 삐딱한 시선으로 따지는 듯한 말투로 늘 비아냥 거렸던 아이였는데….
그러나 그 학생은 표현과 행동 방식만 삐딱했었다.
학생은 남들이 웃음을 스트레스 해소 수단으로만 생각할 때,오히려 웃음이 공격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처음에는 도전이고 반항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조소와 풍자라는 웃음을 활용한 공격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웃으면 복이 온다는 긍정적인 명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다보니,웃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관통시킬 수 없는 것이다.
어떤 명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비워보자.
그러면 새로운 사실을 관통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웃음이 긍정적이기만 하다는 생각을 비울 때,새로운 생각이 관통할 수 있다.
미래 사회에는 부모 면허가 나온다는 글을 읽는다.
아이들 모두가 뜨악해 하면서도 한편 인정을 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학대하고,보험금을 타낼 수단으로 여기는 현실이 더 심화되는 요즘 필요악으로 그런 면허가 나올 만하다는 것을 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화두를 두고 토론을 하면서 우리는 서로 부모 면허가 필요하다,필요없다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그때 우리의 머리를 일순간에 비우게 하는 발언이 나왔다.
운전면허도 면허증을 따기 이전에 교육부터 하지 않느냐?
교육을 시키지 않고,면허증을 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맞다.
면허증의 필요 여부로만 머릿속이 꽉 차 있을 때,부모 교육이 선행해야 한다는 생각은 모두의 생각을 통쾌하게 비워주었다.
논술을 쓸 때 승부로만 머리를 채우지 말자.승부를 초월해서 욕심과 생각을 비우자.
통념을 버린 무뇌아로 다시 태어나 보자.
그렇게 해야 제3의 초월적 견해가 영감처럼 들어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