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왜 그렇게 주책없이 굴어?" "그래,그 이는 좀 주책이지."

"그의 소식을 친구를 통해 우연히 듣게 되었다.

" "10년 전에 헤어진 친구를 오늘 우연찮게 길에서 만났다."

'주책없다/주책이다'나 '우연하다/우연찮다'는 우리말 속에서 특이한 존재양식을 보인다.

모두 두루 쓰이는 말인데,형태상으로는 서로 정반대의 의미를 담은 모습이면서도 실제로는 거의 비슷한 뜻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단어 자체에 의미적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줏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여 몹시 실없음'을 나타낼 때 우리는 그를 향해 '주책없다'라고 하기도 하고 때론 '주책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일을 미리 계획하거나 약속하지 않은 상태,즉 뜻하지 않게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우연하다'라고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 부정 형태인 '우연찮다'란 말도 같은 상황에서 흔히 쓰는 것은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우선 '주책'은 한자어 '주착(主着)'이 변한 말이다.

어원적으로 초생달(初生달)에서 초승달로, 산행(山行)에서 사냥으로 발음 자체가 바뀐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한자 의식도 사라져 우리 고유어처럼 쓰이는 말이다.

'주착'이란 '줏대가 있고 자기 주관이 뚜렷해 흔들림이 없다'란 뜻이지만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주착'이 변한 말 '주책'의 용법은 의외로 까다로워 제대로 쓰기가 간단치 않다.

우선 '주책이다'란 말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책이고 가볍기로서니 사람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라고 한다면 틀린 말이다.

'아무리 주책없고…'라고 해야 한다는 얘기다.

'주책'이 '일정하게 자리 잡힌 주장이나 판단력'을 뜻하므로 그 반대,즉 '일정한 줏대가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상태'는 '주책없다'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 주책이야"란 식으로 잘못 쓰기 때문에 규범적으로 아예 '주책이다'란 말은 '주책없다'의 잘못이라 못 박았다.

하지만 발음이 변하면서 '주책' 자체는 '일정한 줏대가 없이 되는 대로 하는 짓'이란 뜻도 아울러 갖게 됐다.

그래서 "주책을 부리다,주책이 심하다" 식으로 명사로서 단독으로는 쓸 수 있다.

'주책바가지'는 '주책없는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다.

'우연히 만나다'와 '우연찮게 만나다'는 더 까다롭다.

눈으로 보기에도 이 둘은 정반대의 말인 것 같은데 실제 쓰이는 것을 보면 뒤섞이기도 하는 등 구별이 쉽지 않다.

우선 '우연하다'는 '어떤 일이 예기치 않게,뜻하지 않게 이루어지다'란 뜻이다.

이에 비해 그 부정 '우연하지 않다'가 준 '우연찮다'는 사전적으로 '(어떤 일이)일부러 뜻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우연한 것도 아니다'로 풀이된다.

이 풀이는 상식적인 기준으로 볼 때,'우연하지 않다'라는 개념이 '우연'의 반대 자질인 '필연'을 함의하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린다.

그냥 단순히 '우연하다'와는 다른 미묘한 의미상의 차이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그 차이란 '우연히'는 '뜻하지 않게','우연찮게'는 '뜻하지 않게는 아니나 그렇다고 딱히 뜻한 것도 아니게'라는 식으로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는 국립국어원의 공식 견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같은 구별은 상당히 모호하고 자의적이다.

그래서 실제 언어생활에서 사람들은 대부분 두 말을 구별하지 않고,구별할 수조차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한국경제신문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