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편일률적인 논술 해제는 가라

기존 논술강좌에서 들어보지 못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 들어가며

지난 2주 동안 생글생글 지상 기획특강 이후 '논술길잡이' 연재를 처음 권유받았을 때 많이 망설인 것이 사실이다.

만인의 눈 앞에 나를 노출한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다.

천편일률적인 논술 해제 지상강의를 답습하기 싫다는 나 자신의 고집도 있었고,너무 많은 내용을 글로 풀다보면 의도와는 전혀 다른 글이 되지 않겠냐는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욕심을 줄이고 작은 부분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좋은 내용을 실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앞으로 10회에 걸쳐 '권호걸의 통합논술 뽀개기'란 타이틀로 연재할 것이다.

논술 문제 해제부터 시작해서 사고법,논술 문제 비판까지 기존의 논술 강좌들에서 다루지 않았던 내용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계획이다.

이 코너가 시험지를 받아들면 무엇부터 써야 하나 하고 막막해하는 많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오늘 첫 시간은 2008학년도 연세대 1차 모의고사 문제로 시작해보자.

이 문제는 사실 학원이나 신문지상에서 너무 많이 다뤄져 다소 식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똑같은 문제라도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내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문제를 선택했다.

학원에서 이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눈을 부릅뜨고 이 지면을 놓치지 않길 바란다.

다른 얘기가 펼쳐질 테니까.

2007년은 논술 교육 역사상,대학 측이 가장 많은 자료를 공개한 해이기도 하다.

사실 다른 분야보다 논술은 상대적으로 대학들이 공개하는 자료의 중요성이 매우 크다.

때문에 올해 보여준 일부 대학들의 성의는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의 입장에선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다.

연세대도 고마운 대학들 중 하나다.

1차 모의고사 내용을 밝히면서 출제의도,채점기준,예시답안 등을 모두 공개했다.

학생들이 막연히 논술에 대해 가지고 있던 답답함을 내려 놓는데 일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견이지만,대학들의 이러한 행동은 더욱 권장되어야 한다.

학생들이 논술을 사교육에 의존하는 이유 중 상당부분은 제대로 된 정보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학들이 발간하는 논술 자료집들은 제대로 된 이정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연세대에서 발표한 자료집 덕분에 연세대 1차 모의고사의 치명적 흠결이 드러난 것이 아이러니라고 해도 좋을까?

이 말을 아마 처음 들어본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학원에서 그토록 많이 이 문제를 풀어주는 데도 아무런 소리를 못 들었는데,문제가 잘못됐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곧 가르쳐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자.

일선에서 강의할 때 선생님들이 문제를 만들어 오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필자는 예시답안을 만들어 오지 않은 선생님들의 문제는 신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이 낸 문제의 완결성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예시답안이기 때문이다.

그 예시답안을 봐야만 문제가 제대로 만들어졌는지 확인해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문제든 예시답안과의 논리적 연관성이 있어야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는 말이다.

지난번 강의에서도 말했듯이 문제를 푸는 데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논리'뿐이다.

물론 배경지식도 도구가 되긴 하지만 위험할 수 있다.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논술은 지식이 아닌 사고력을 측정하는 시험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이 생각한 논리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로서 구성하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연세대는 이러한 점에서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을 연세대 측에서 공개한 출제의도와 모범답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문제인지 한번 살펴보자.

2. 제시문 선택에 신중해야

[문제] 아래 제시문을 읽고 문제에 답하시오.(세 문제 모두 답하시오)

(가)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이기적이거나 제한된 수준의 관용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 상호 호혜적인 이익이 예상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쉽게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상호 호혜적인 행동이라도 그것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친절에 대한 보상은 상대의 관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매우 불확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중략]

당신의 옥수수는 오늘 여물고 내 것은 내일 여물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당신이 추수하는 것을 돕고 내일 당신이 나를 돕는다면,이는 우리 둘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호의도 갖고 있지 않으며,당신 역시 나에게 아무런 호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을 위해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보상에 대한 기대는 나를 실망시킬 것이며,나로 하여금 헛되이 당신의 호의에 매달리게 할 것이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혼자 일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며,당신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를 대할 것이다.

(나) 미나모토조에는 선술집과 음식점,가라오케 등이 기미우라 역을 중심으로 난 좁은 골목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음식점과 술집들은 각기 나름대로의 분위기를 갖추고 있으나,사람들은 자기들이 자주 찾아 가는 곳을 또 찾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약속을 할 경우에 서로가 잘 아는 곳에서 모이고 누구를 만나려면 어디에 가야 하는지를 알고 있다.

이발소를 하는 마에바시를 만나려면 요네다가 하는 장어구이 집에 가야 하고,목수 일을 하는 카미를 찾으려면 마에하라 자매가 운영하는 선술집에 가면 된다.

쓰노다 아줌마는 학부모 모임에서 사람들과 식사한 후 커피를 마시기 위해 어린 시절 친구의 형이 하는 커피숍에 간다.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오게 되면,이사 온 사람들은 바로 조그만 케이크나 '데누구이(수건의 일종)'를 가지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인사를 가게 된다.

일종의 공식적인 인사인 셈이다.

이러한 인사는 새로운 가구가 주위의 이웃들과 공식적인 관계를 맺는 시작이다.

사람들은 이웃이 집을 비운 사이 서로의 집을 봐주고,주부들은 특별세일이나 새로 개점한 가게에 대한 정보를 나누며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지방 특산물을 선물로 건넨다.

도쿄 인근 지역에서 야채를 재배하는 농민들은 한 달에 두서너 차례 미나모토조를 방문한다.

이들은 주로 할머니들인데 자신들이 가져올 수 있는 만큼의 야채를 가지고 와서는 거리에서 팔기보다 벌써 수 년째 방문해온 미나모토조의 가정을 한 집 한 집 찾아간다.

쓰노다 아줌마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집에 찾아온 야채 파는 할머니에게서 야채를 사는데,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좀 더 사서 아이를 시켜 이웃에도 나눠준다.

지난번 이웃이 보낸 선물에 대한 보답이다.

미나모토조 사람들은 도쿄시내 어딘가에 사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자신들의 집에서 장례식을 치른다.

그렇다고 해서 장례식이 간단한 것은 아니다.

장례식의 많은 부분은 장의사의 협조로 이루어진다.

장례에 필요한 제단,향로,제등,관 등은 모두 장의사가 준비한다.

장례식에서는 초등학교 근처에 사는 모리구치씨가 염과 같은 전문적인 일을 담당한다.

대신 미나모토조의 주민과 이웃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한다.

특히 죽은 이가 마지막 헤어짐의 인사를 하는 고구베쓰시키(告別式) 바로 전날에는 밤을 새워 쓰야(通夜)를 하면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접대한다.

(다) 어디서 왔는지 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야옹 울고 있었다.

어둠이 밀려왔을 때 손에 장갑을 쥔 여자가 다가와서 고양이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면서 자루에서 먹이를 꺼내주었다.

그 때 사르트르가 이렇게 제안해 왔다.

'2년 동안 나는 파리에서 살 수 있도록 손을 쓰면 되는 것이고,우리는 가능한 한 친밀한 생활을 하자.

2,3년 동안 헤어져 살게 되더라도 어딘가 세계의 한 모퉁이에서,예를 들면 아테네 같은 곳에서 재회해 다시 얼마 동안 공동생활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하자.우리는 결코 완전히 남남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둘 중에 어느 쪽인가가 상대를 찾을 때 반드시 응할 것이며 우리 두 사람의 결합 이상 가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속박과 습관이 되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그런 부패에서 우리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동의했다.

나는 사르트르가 예정하고 있는 이별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득한 미래의 일같이 생각돼 미리부터 마음을 쓰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도 가끔 두려움이 내 마음을 스쳐갈 때 나는 그것이 나 자신의 허약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극복하기 위해 애썼다.

사르트르가 약속에 철저하다는 점을 나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으며,그 점은 내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그의 경우 하나의 계획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의 어떤 순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22개월 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위에서 오후 5시에 만나자"고 했다면,나는 정확히 22개월 후 오후 5시에 아크로폴리스 위에서 그를 재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 나는 사르트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는 한 그가 내게 불행을 안겨줄 리 없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 2년의 계약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가 이론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자유를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이 새로운 관계에 주저없이 모든 것을 쏟을 작정이었다.

우리는 또 하나의 약속을 했는데,그것은 둘 다 거짓말을 하지 않고 서로 숨기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약속이었다.

[문제 1] 제시문 (가)에서 제기되고 있는 문제는 무엇이며,이 문제에 대해 제시문 (나)와 제시문 (다)는 각각 어떠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비교하시오.(배점:30점)

[문제 2] 서로 다른 방식의 인간관계를 제시한 제시문 (나),제시문 (다) 가운데 본인은 어떤 방식이 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지,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지 밝히시오.(배점:35점)

※ 편의 상 [문제3]과 도표는 생략했다.

오늘 이야기할 부분과 크게 상관없는 내용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 연세대 1차 모의 논술문제 해설

제시문 (가)가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인간의 이기심 때문에 생기는 상호 관용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이다.

제시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서로를 믿지 못하기 때문에,협력을 하면 이익이 예상되는 경우에도 협력하지 못하고 결국 서로 손해를 보는 결과를 택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는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볼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계획하는 수많은 일들이 '관용에 대한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상호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계획되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세대 역시 이러한 문제의식을 학생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즉 자연상태에서 일어나는,전술한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공동체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이 공동체를 운영하는 원리는 각기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해 학생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묻고 싶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의문에 걸맞게 문제를 구성해야 했다.

먼저 두 제시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출제의도를 통해 살펴보자.(자료는 연세대측이 공개한 통합논술 자료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다)

"이번 모의시험에서는 ①개인들 사이의 협력과 이를 통한 사회의 구성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문제제기가 제시문 (가)에 나타나 있으며,제시문 (나)와 (다)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주고 있다.

제시문 (나)와 (다)는 개인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기초하여 사회를 구성하는데 ②서로 다른 원리가 있음을 이해하고 그 원리들을 서로 비교하여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구성할 때 개인들의 동기와 목적은 서로 다를 수 있다.

크게 보아 사회를 구성하는 ③기본원리는 정신적,감정적 유대가 전제된 공동체적 관계와 개인들 사이의 공식적 약속을 중시하는 계약적 관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흔히 감정적 결속에 입각한 개인들 사이의 협력은 가족이나 친구집단에서 나타나며,계약에 입각한 인간관계는 상거래나 보다 공식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④제시문 (나)와 (다)는 이러한 인식에 더하여 계약적 관계가 가족이나 연인관계에서도 성립될 수 있으며,감정적 결속이 지역공동체와 같은 보다 넓은 공간과 집단에서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보다 창의적인 생각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해준다."

밑줄 친 ④에 주목해보자.흔히 생각하는 통념을 깸으로써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건 제시문의 내용에 비춰볼 때 과도한 요구이다.

우선 [문제 1]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관용을 베풀었을 때 생기는 보상의 불확실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출제위원이 의도한 대답은 '정서적 유대'와 '계약'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개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정서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계약이 해결할 수 있고 혹은 그 반대가 가능하다는 논의가 성립되고,따라서 [문제 2]를 해결할 수 있다.

문제를 구성하는 논리는 타당하다.

그렇다면 논의의 초점은 제시문에서 과연 '정서적 유대'와 '계약'이라는 단어를 도출할 수 있는가에 모아진다.

제시문 (나)는 큰 문제가 없어보인다.

미나모토조 마을 사람들은 상호 관용의 불완전성을 마을 공동체의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오랜 관습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논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

제시문 (다)를 살펴보자.

제시문 (다)에서도 '계약'이라는 단어가 보인다.

별로 마음에는 안 들지만 여기서도 '계약'이라는 단어를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고 하자.그러나 생각해볼 점은 제시문 (다)가 말하는 계약의 성격이 (가)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볼 수 있겠느냐 이다.

우선 이 제시문의 성격을 이해해야 한다.

두 주인공은 연인 사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앞으로 어떻게 동거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리고 같이 사는 기간을 정하는 일정한 계약을 한다.

출제진이 의도한 대로 친밀한 관계사이에서도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제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다.

이 '계약'이,상호 관용을 베풀었을 때 생기는 보상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느냐이다.

'계약'이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 제시문은 출제의도에 비추어 타당한 문제다.

그러나 여기서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것은 '계약'이 아니다.

그 이유는 '계약'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제시문 (다)에 나타난 '계약'의 성격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제시문 (다)의 주인공들은 상호 관용의 불확실성을 이미 상호 신뢰라는 이름으로 해결한 사람들이다.

(근거 지문:사르트르가 약속에 철저하다는 점을 나는 이미 체험하고 있었으며,그 점은 내 마음의 버팀목이 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나는 사르트르가 나보다 먼저 죽지 않는 한 그가 내게 불행을 안겨줄 리 없다는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제시문에서 추론할 수 있는 해답은 계약이 아니라 '경험에 근거한 상호 신뢰'다.

이 제시문의 원전은 시몬느 보봐르의 '계약 결혼'이다.

두 주인공이 계약결혼을 했던 이유는 서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결혼은 사실 인생의 가장 큰 계약이다.

그런데 문제는 파기하는 데 너무 큰 부담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애정이 식어도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혹은 계약 때문에 그냥 참고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이 경우 평생 서로에게 얼마나 큰 구속과 속박이 되는가? 두 사람은 이 점을 주목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계약을 말하는 이유는 결혼이라는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서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다.

따라서 계약의 초점은 '동거나 결혼'이 아니라 '이별'이다.

그렇다면 (다)에 나타난 계약은 서로 간의 불확실성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서로의 지위를 한시적으로만 인정함으로써 다시 불확실한 상태(서로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어 주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것이 된다.

친밀한 사이에도 계약이 성립된다라는 출제진의 의도는 성립했을지 몰라도 그 계약이 제시문 (가)에서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의 성격을 가진 계약은 아니기 때문에 (다)는 잘못 출제한 제시문이다.

문제의 의도에 맞는 제시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어야 했다.

예를 들면 여러분과 필자의 관계다.

필자는 강의를 하는 사람이다.

지금은 지면상에 글을 쓰기 때문에 필자에 대한 신뢰를 갖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지만(아니려나… ^^),강의실에서 처음 만난 여러분과 나는 서로 믿을 수 없는 상태다.

하지만 필자의 노하우를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 있고,여러분(엄밀히 말하면 학부모님들)에게 받는 수강료로 필자의 통장을 촉촉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은 상호 이익이다(너무 적나라해서 미안! 확실한 예를 들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것을 믿을 수 있나?

강의한다고 해놓고서 인생 얘기나 풀어놓고,아니면 여러분이 등록은 열심히 했는데 자취를 감추면 어떡하나?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우리 사이의 계약이다.

이후 그 계약을 이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서로 간의 신뢰가 싹트고 더 발전된 인간관계로 나아간다는 설명이 가능하고,이 경우에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에 계약이 적합하다라는 주장까지 가능하다(물론 [문제 2]의 답이 '계약'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면 출제의도까지 고려한다면 할리우드 스타인 캐서린 제타존스와 마이클 더글러스와의 계약을 들 수 있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인 데도 불구하고,제타존스는 결혼한 더글러스를 상대로 '바람을 피울 때마다 벌금 지불''이혼시 위자료 금액' 등의 상세한 내용이 담긴 혼전계약서에 서명을 받아낸 후 식을 올렸다.

출제진이 의도한 친밀한 관계사이에서도 계약이 가능하다는 의도를 나타내기에 충분한 제시문이다.

더구나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계약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잘 살고 있다.

서로 느낄 수 있는 관용에 대한 불확실성도 해결하고 있다.

계약이 없다면 더글러스가 바람 피울까봐 늘 걱정할 텐데(더글러스는 할리우드의 유명한 바람둥이다) 계약이 있으니 제타존스는 마음 놓고 자신의 애정을 더글러스에게 베풀 수 있다.

이건 더글러스에게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두 사람의 금슬은 더욱 좋아진다.

이만하면 계약이 인간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 줄 수 있다는 사실까지 훌륭히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연세대에서는 너무 욕심을 낸 듯하다.

의도와도 안 맞는 제시문을 내놓고 자신들이 옳다고 채점까지 했으니 필자 입장에선 이 문제가 모의고사 문제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뿐이다.

정리해 보자.제시문 (가)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제시문 (나)는 '정서적 유대관계'를 말하고 있고 제시문 (다)는 '경험을 근거로 한 상호 신뢰'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정서적 유대관계나 상호 신뢰 모두 정서라는 같은 범주의 말이다(신뢰도 정서이니까).

따라서 대립한 두 견해의 차이점을 통해 다각적 해결 방법을 모색하게 했던 연세대 측의 의도는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3. 예시답안 공개해야

논술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잘못하면 논리상의 오류가 교묘히 숨어있을 수 있는 성질의 시험이다.

더구나 언어논술 같은 경우 논리적 오류를 답을 보지 못하면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다.

모의고사라고 하지만 한번 실수했던 대학이 다시 실수하지 말란 법은 없다.

실제 연세대는 올해 수시 2-2에서 문제 오류 시비로 한동안 고생을 했다.

다른 대학도 마찬가지다.

때문에 문제와 답을 공개하고 자신들의 출제상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모습이 성의 있는 자세라고 생각한다.

수능도 정답 이의신청을 받는 세상이다.

논술 특성상 정답 이의신청은 받지 않는다 하더라도,적어도 예시답안과 출제의도 정도는 공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일각에선 사교육 과정에서 예시 답안만 베끼는 현상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러나 올해 입시를 치러본 대학들은 알 것이다.

과연 예시답안을 공개해 채점상의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는지.

사교육을 받지 않고 혼자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해서도,대학 스스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예시답안 공개는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다.

다음 시간에는 이 문제에 대한 모범답안을 통해 글쓰기의 실제에 대해 알아보자.

권호걸 한경 경제교육연구소 통합논술 연구위원 mega@ed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