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그리스도를 모른 채 죽어가는 것이 가슴 아파서 그랬다고 할지라도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믿음은 강요로밖에 보이질 않네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한 스님이 좌정하고 있는데 어떤 전도사님이 그 분의 머리에 손을 대고 안수를 했다고….과연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할 만한 일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알리는 행동일까요. 예수님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랑은 벌써 변질됐다고 할 수 있지요."(아이디:비포 더 레인)
"교회는 베드로 위에,선교는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집니다! 정부는 아프간에 못 들어가게 했어도,복음은 들어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아이디:코람데호)
개신교계 인터넷 매체인 뉴스앤조이에 실린 댓글들이다.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납치됐다가 돌아온 후에도 개신교의 선교 방식을 둘러싼 교회 안팎의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이른바 '공격적 선교'에 대해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물론 개신교계 내에서도 자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독교사회책임'을 비롯한 교계 단체들이 '기독교인들의 반성과 다짐'이라는 성명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행동한 것에 대해 크게 반성한다"고 밝힌 것이나 원로 목사들을 비롯한 목회자들이 참회 기도회를 갖고 "교회 위기의 원인이 우리들에게 있다.
교회를 향한 바깥 세상의 실망과 원망,정죄와 부정적인 비판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고백한 것이 그런 사례들이다.
반면 아프간 피랍 사태를 '사탄의 도전'이나 선교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순교로까지 간주하면서 선교 활동 노선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또한 당장은 국민적 비난 여론이 비등한 만큼 낮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자숙하되 적극적인 선교 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계 일각의 자성과 참회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 방식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아프간에서의 피랍 사태는 위험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져 온 한국 교회들의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해외 선교 방식이 불러온 비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전에도 있어 왔고,한국 교회의 선교 지상주의적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교회연합기구 및 주요 교단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해외 선교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위험지역 선교를 신앙심의 척도로 삼는 분위기가 얼마나 바뀔지는 미지수다.
한국 교회들의 해외 선교 방식은 지역과 대상을 가리지 않을 만큼 공격적이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2006년 현재 173개국에 1만6616명이 파송돼 있다.
이는 영국보다 2배 많은 숫자이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아프리카(61개국) 유럽(42개국) 아시아(33개국) 아메리카(25개국) 오세아니아 및 태평양권(12개국) 등 전 세계에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마다 '몇 개국에 몇 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이른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미얀마와 같은 불교 국가나 아프간과 같은 이슬람 지역,위험이 상존하는 분쟁 지역을 골라서 가기도 한다.
법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중국에서도 옌볜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한국 선교사가 비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때로는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며 무모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2004년 4월 이라크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한국인 목사 7명 중 2명은 3개월 뒤 다시 무단으로 이라크에 들어갔다가 우리 정부에 의해 강제 귀국 조치됐다.
김선일씨가 살해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목회자 5명이 이라크에 무단 입국하면서 '우리가 죽으면 시신을 실험용으로 써 달라''순교자 ○○○'라고 쓰인 목걸이까지 차고 있었다.
지난해 8월에는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대규모 '평화 축제'를 개최하려던 한국인 신자 1200여 명이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과 신변안전 문제로 출국 명령까지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선교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교인들에게 선교는 지상 명령처럼 주어진 과제다.
성경에서 예수가 '땅끝까지 전도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설명한다.
또한 내가 믿어 보니 좋기 때문에 남에게 좋은 것을 알리고 권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이나 역 광장 등 다중이 모인 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가두 선교도 이들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는 비(非)신자와는 사뭇 다르다.
비신자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선교 행위에 대해서도 신자들은 관용적인 태도로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같은 개신교만의 내적 공감대가 전체 사회에서의 소외를 초래한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지난 4일 발표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 관련 자료집 '한국 교회와 선교에 주어진 새로운 도전'에서 "한국 교회의 고립된 집단주의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내부 결속에만 치중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소통의 통로조차 막아 버렸다는 얘기다.
한국 교회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돼 온 실적주의,성장주의도 이 같은 선교 방식을 부추겼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궤를 같이해 온 개신교는 그동안 신도 수,헌금액,교회 건물의 크기 등 외형적 규모를 중시하는 성장주의를 지향해 왔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교 방식은 이 같은 성장주의가 필연적으로 초래한 결과다.
몇 개국에 몇 명의 선교사와 봉사단을 보냈느냐를 그 교회의 훈장처럼 자랑하는 교계의 풍토가 이를 말해 준다.
다종교 공존 사회에서 타 종교와의 평화로운 관계 설정도 공격적 선교 방식을 바꿔야 할 이유로 손꼽힌다.
특정 종교가 한 지역을 지배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여러 종교가 같은 지역에 공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땅끝까지 전도'를 외쳐도 실제로 세계 인구 전체를 교회 신자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선교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배타적·우월적 선교가 아니라 타 문화권과 타 종교를 존중하는 관계중심적 선교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선교와 봉사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아프간 피랍사건 이후에도 교계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과 선교를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분쟁 지역이야말로 봉사와 구호 활동이 가장 필요하며,그런 점에서 현지인의 삶과 함께하려는 선교와 봉사 활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웃을 위한 봉사는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의무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로 시작한 행동이라도 그 결과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더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들이 '단기 선교'라는 이름으로 봉사 활동을 떠났던 점을 감안하면,그리고 그런 방식의 봉사 활동을 선교 대상자들이 싫어한다면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fireboy@hankyung.com
"교회는 베드로 위에,선교는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집니다! 정부는 아프간에 못 들어가게 했어도,복음은 들어가야 합니다. 할렐루야! 아멘!"(아이디:코람데호)
개신교계 인터넷 매체인 뉴스앤조이에 실린 댓글들이다.
분당 샘물교회 교인들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납치됐다가 돌아온 후에도 개신교의 선교 방식을 둘러싼 교회 안팎의 논란은 여전히 뜨겁다.
이른바 '공격적 선교'에 대해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물론 개신교계 내에서도 자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독교사회책임'을 비롯한 교계 단체들이 '기독교인들의 반성과 다짐'이라는 성명을 통해 "기독교인들이 정부의 권고를 따르지 않고 행동한 것에 대해 크게 반성한다"고 밝힌 것이나 원로 목사들을 비롯한 목회자들이 참회 기도회를 갖고 "교회 위기의 원인이 우리들에게 있다.
교회를 향한 바깥 세상의 실망과 원망,정죄와 부정적인 비판에 귀기울여야 한다"고 고백한 것이 그런 사례들이다.
반면 아프간 피랍 사태를 '사탄의 도전'이나 선교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순교로까지 간주하면서 선교 활동 노선을 지속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또한 당장은 국민적 비난 여론이 비등한 만큼 낮은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자숙하되 적극적인 선교 방식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개신교계 일각의 자성과 참회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 방식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아프간에서의 피랍 사태는 위험 지역에서 경쟁적으로 이뤄져 온 한국 교회들의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해외 선교 방식이 불러온 비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또한 이런 일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이전에도 있어 왔고,한국 교회의 선교 지상주의적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 교회연합기구 및 주요 교단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해외 선교 방식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것임을 밝히고 있지만 위험지역 선교를 신앙심의 척도로 삼는 분위기가 얼마나 바뀔지는 미지수다.
한국 교회들의 해외 선교 방식은 지역과 대상을 가리지 않을 만큼 공격적이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자료에 따르면 2006년 현재 173개국에 1만6616명이 파송돼 있다.
이는 영국보다 2배 많은 숫자이며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규모다.
아프리카(61개국) 유럽(42개국) 아시아(33개국) 아메리카(25개국) 오세아니아 및 태평양권(12개국) 등 전 세계에 가지 않은 곳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마다 '몇 개국에 몇 명의 선교사를 파견했다'는 것을 자랑하고 이른바 '미전도 종족'에게 복음을 전한다며 미얀마와 같은 불교 국가나 아프간과 같은 이슬람 지역,위험이 상존하는 분쟁 지역을 골라서 가기도 한다.
법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중국에서도 옌볜 등을 중심으로 수많은 한국 선교사가 비공식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때로는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며 무모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2004년 4월 이라크에서 무장세력에 납치됐다가 풀려난 한국인 목사 7명 중 2명은 3개월 뒤 다시 무단으로 이라크에 들어갔다가 우리 정부에 의해 강제 귀국 조치됐다.
김선일씨가 살해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목회자 5명이 이라크에 무단 입국하면서 '우리가 죽으면 시신을 실험용으로 써 달라''순교자 ○○○'라고 쓰인 목걸이까지 차고 있었다.
지난해 8월에는 아프간 수도 카불에서 대규모 '평화 축제'를 개최하려던 한국인 신자 1200여 명이 이슬람 성직자들의 반발과 신변안전 문제로 출국 명령까지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런 선교 방식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교인들에게 선교는 지상 명령처럼 주어진 과제다.
성경에서 예수가 '땅끝까지 전도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이들은 설명한다.
또한 내가 믿어 보니 좋기 때문에 남에게 좋은 것을 알리고 권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이나 역 광장 등 다중이 모인 곳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가두 선교도 이들은 당연한 일로 받아들인다.
실제로 지하철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들에 대한 신자들의 태도는 비(非)신자와는 사뭇 다르다.
비신자들이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선교 행위에 대해서도 신자들은 관용적인 태도로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 같은 개신교만의 내적 공감대가 전체 사회에서의 소외를 초래한다는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지난 4일 발표한 아프가니스탄 피랍사건 관련 자료집 '한국 교회와 선교에 주어진 새로운 도전'에서 "한국 교회의 고립된 집단주의가 위기를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내부 결속에만 치중해 사회적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소통의 통로조차 막아 버렸다는 얘기다.
한국 교회의 고질적 병폐로 지적돼 온 실적주의,성장주의도 이 같은 선교 방식을 부추겼다.
한국의 경제 발전과 궤를 같이해 온 개신교는 그동안 신도 수,헌금액,교회 건물의 크기 등 외형적 규모를 중시하는 성장주의를 지향해 왔고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선교 방식은 이 같은 성장주의가 필연적으로 초래한 결과다.
몇 개국에 몇 명의 선교사와 봉사단을 보냈느냐를 그 교회의 훈장처럼 자랑하는 교계의 풍토가 이를 말해 준다.
다종교 공존 사회에서 타 종교와의 평화로운 관계 설정도 공격적 선교 방식을 바꿔야 할 이유로 손꼽힌다.
특정 종교가 한 지역을 지배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은 여러 종교가 같은 지역에 공존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아무리 '땅끝까지 전도'를 외쳐도 실제로 세계 인구 전체를 교회 신자로 만들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선교가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배타적·우월적 선교가 아니라 타 문화권과 타 종교를 존중하는 관계중심적 선교로 바꿔야 한다는 뜻이다.
선교와 봉사 활동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아프간 피랍사건 이후에도 교계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 활동과 선교를 지속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여전하다.
분쟁 지역이야말로 봉사와 구호 활동이 가장 필요하며,그런 점에서 현지인의 삶과 함께하려는 선교와 봉사 활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웃을 위한 봉사는 모든 종교의 기본적인 의무다.
하지만 아무리 선의로 시작한 행동이라도 그 결과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더구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교회들이 '단기 선교'라는 이름으로 봉사 활동을 떠났던 점을 감안하면,그리고 그런 방식의 봉사 활동을 선교 대상자들이 싫어한다면 방법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