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학력위조와 간판사회증후군
부모님 세대의 '완소남' 알랭 들롱은 1960년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 야심만만한 젊은이 '리플리'를 연기했다. 리플리는 자신이 죽인 친구 행세를 함으로써 돈과 지위를 얻지만 끝내 거짓이 밝혀져 몰락한다. 그런 대담함과 대중을 속인 거짓말이 비슷해서일까. 위조된 학력을 바탕으로 큐레이터로서는 최고 지위라 할 수 있는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까지 올랐다가 졸지에 나락으로 떨어진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도 리플리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폭로들이 이어졌다. 라디오 영어교육 프로그램의 인기 진행자였던 이지영씨,능력 있는 건축가로 보였던 이창하 전 교수,'공연계의 대모'라는 김옥랑 동숭아트센터 대표까지. 각자의 '태양은 가득히'를 살고 있는 수많은 리플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사회적 지탄을 받고 거짓말을 딛고 올라선 지위에서 굴러떨어졌다.'죄'를 지은 이들은 자리에서 물러나고 비난을 받는 등 사회적인 처벌을 받고 있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이 찜찜함의 이유는 뭘까.

◆간판,그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신정아 사건은 강남 학원가까지 불어닥친 학력 검증 열풍으로 연결됐다. 그 와중에 만화가 이현세씨는 자신이 고졸임에도 대학을 중퇴한 것처럼 학력을 위장했다고 고백했다.

영화 '디 워'로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심형래 감독도 다니지 않은 대학을 다닌 것으로 거짓말했다는 게 밝혀졌다. 이씨는 "데뷔 초 대학 다녔다고 하면 일거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만화가로 성공하기 위해서도,개그맨이 되기 위해서도 대학 간판이 필요한 사회. 학력과 직업적 능력의 상관관계가 사실상 거의 없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학력을 속일 수밖에 없는 사회 분위기.'간판 증후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한 포털 사이트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네티즌의 77%가 신 전 교수 사건의 근본원인이 개인의 능력보다 간판을 중요시 여기는 사회에 있다고 했다. 또다른 조사에 따르면 설문 응답자의 19%가 "한 번 정도 학벌 위조를 생각해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못하거나 명문대를 졸업하지 못한 사회구성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간판 증후군의 실체다.

◆간판,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무거워 보이던 간판이 생각보다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도 폭로됐다. 학력을 속인 '가짜'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줬고 종종 '진짜' 간판을 가진 이들보다 나았다.

신 전 교수는 자신이 기획한 전시로 정규 과정을 밟은 큐레이터들과 경쟁해 몇 차례 상까지 받았다. 이지영씨 역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7년간 이끌었다. 학력은 없었지만 매일매일 청취자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은 셈이다. 이 전 교수 역시 호텔 객실과 고급 아파트,대기업 본사 등 다양한 건물의 인테리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김 대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공연계에서 정상에 올라섰다.

매년 해외에서 학위를 받고 돌아오는 큐레이터들은 많지만 신 전 교수처럼 재원 조달 능력과 관람객 동원 능력을 가진 이들은 찾기 힘들다. 이씨의 경우 학원에서도 진짜 학위를 받은 동료 강사보다 항상 두 배 이상의 수강생이 찾는 인기강사였다.

짧게는 5년,길게는 10년 이상 관련 분야를 공부하며 미국 등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이들보다 최소한 실무 능력에서는 나은 실력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간판이 간판값을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간판 증후군 사회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간판,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무거운 간판을 가볍게 할 방법부터 생각해 보자. 간판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이유 중 하나로 기업이나 학교에서 사람을 뽑는 과정에서 학벌을 지나치게 많이 본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인재를 평가하는 데 충분한 평가 장치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문제로 연결된다. 다양한 능력을 평가할 만한 장치가 부족할수록 학력과 같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벼운 간판에도 무게를 실을 필요가 있다. 실상 가벼운 간판은 무거운 간판보다 문제가 크다. 오랜 시간 제도권 교육을 받은 이들의 능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은 교육 자체의 정당성을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으로나 사회로서나 엄청난 낭비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언제쯤 간판이 아닌 진짜 실력으로 겨루는 사회로 성숙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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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學歷)의 효용은?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학력. 어떤 이점이 있기에 존재하는 걸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학력이 보편화된 기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신분에 얽매여 있던 봉건제 사회에서는 학력이 큰 의미가 없었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소수에 불과했고 이들 귀족 계급만이 과거 등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학력이 사회 전체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교육 기회가 시민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현대에 들어서다. 신분이 없어진 사회에서 학력을 통해 최소한의 자격을 평가하고 시험의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국가에서는 공무원을 뽑을 때 어떤 신분 출신인가는 묻지 않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는 묻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과정을 통해 학력을 쌓으면 개인은 공직 등에 진출하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봉건시대의 신분을 대체하는 학력은 시민들에게 폭넓은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적 약속인 셈이다.

더 나아가 개인은 보다 나은 학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한다. 여러분이 땀흘려 공부하는 것도, 대학원에 진학한 선배들이 논문에 매달리는 것도 보다 나은 학력을 위한 것이다. 부작용도 있지만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의 지적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

관점에 따라서는 과도한 학벌주의의 피해자일 수 있음에도 신정아 전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이 같은 학력의 효용 때문이다. 위조된 학력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노력보다는 남을 속여서 학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결국 이것은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학벌주의가 낳는 여러 부작용에도 우리가 학벌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는 이유다.
우리를 주눅 들게 하는 학력. 어떤 이점이 있기에 존재하는 걸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학력이 보편화된 기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신분에 얽매여 있던 봉건제 사회에서는 학력이 큰 의미가 없었다. 국가의 중요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사람들은 선택된 소수에 불과했고 이들 귀족 계급만이 과거 등의 시험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학력이 사회 전체의 관심사로 떠오른 것은 교육 기회가 시민에게 동등하게 주어진 현대에 들어서다. 신분이 없어진 사회에서 학력을 통해 최소한의 자격을 평가하고 시험의 기회를 주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국가에서는 공무원을 뽑을 때 어떤 신분 출신인가는 묻지 않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했는지는 묻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회적으로 정해진 과정을 통해 학력을 쌓으면 개인은 공직 등에 진출하는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봉건시대의 신분을 대체하는 학력은 시민들에게 폭넓은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적 약속인 셈이다.

더 나아가 개인은 보다 나은 학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한다. 여러분이 땀흘려 공부하는 것도, 대학원에 진학한 선배들이 논문에 매달리는 것도 보다 나은 학력을 위한 것이다. 부작용도 있지만 개인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의 지적 발전을 촉진하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

관점에 따라서는 과도한 학벌주의의 피해자일 수 있음에도 신정아 전 교수를 비롯한 사람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이 같은 학력의 효용 때문이다. 위조된 학력이 처벌받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노력보다는 남을 속여서 학력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결국 이것은 사회 전반의 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다. 학벌주의가 낳는 여러 부작용에도 우리가 학벌 자체를 파괴할 수는 없는 이유다.

노경목 한국경제신문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