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73, 난 지금도 내일을 향해 뛰고 있다"
이윤재 ㈜피죤 회장(73)은 항상 양복 상의 왼쪽에 비둘기 문양이 새겨진 피죤 브로치를 달고 다닌다. 세탁이라고 해 봐야 비누가 고작이었던 1970년대 섬유유연제란 생소한 '물건'을 팔았으며 다국적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알토란 같은 토종 기업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불혹이 넘은 나이에 피죤을 세운 지 벌써 29년,하지만 70대임에도 불구,그의 열정은 여느 젊은이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매일 내일을 향해 뛰고 있다"는 그의 눈빛은 '형형하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7남매 막둥이가 졸지에 독자(獨子)된 사연
이 회장의 삶은 '도전' 그 자체였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친형제들을 잃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도 했고,스스로도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 회장은 서울 토박이다. 할아버지가 정이품 당상관을 지냈을 정도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기업가의 길로 방향을 잡으셨다. 할아버지가 한·일 합방을 비관해 술로 날을 지새운 데다 일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가산을 몰수당하자 선일운수란 운송회사를 차리고 기업가로 나선 것. 이 회장은 "선일운수는 피죤에 비하면 10배 정도 큰 회사였다"며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한 시간가량 내려가면 원덕과 양동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당시 이 일대 수백만평의 논밭이 우리 집 소유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 말기에 아버지 회사가 강제로 조선운수와 합병당한 데다 해방 후엔 미 군정에 의해 적산으로 분류돼 재산을 몽땅 몰수당한 것. 게다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님과 누님들이 결핵으로 앓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병세가 악화돼 유명을 달리했다. 7남매(3남4녀) 중 누나 한 명만 남고 모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회장은 졸지에 장남이 됐다.
이 무렵,자칫하면 북한 인민군에 붙잡혀 갈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서울 양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얘기다. "어느 날 학생 전원을 강당으로 소집하기에 가봤더니 팔에 완장 찬 사람들이 인민군 입대원서를 쓰라고 윽박지르더군요. 죽었다 싶었죠.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학생들을 지휘하는 좌익 간부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더라고요. 이때다 싶어 '형님'하면서 화장실 좀 다녀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뜻 보내줬습니다. 당시 학교 뒤에 산이 있었어요. 그 길로 도망쳐 아버지랑 집 마룻바닥에 들어가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와서 밥을 먹고 그랬습니다. 그때 인민군에 끌려갔던 친구들은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무역회사 다니며 세상에 눈뜨다
이 회장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A.I. 메리트 앤 컴퍼니'란 무역회사에 친척 '빽'으로 들어가면서다. 직원 5명이 고작이고 사무실에 양초조차 없던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이때 신용장 개설하는 것에서부터 세일즈까지 기본을 다 배웠다.
이 회장은 처음부터 남다른 승부 근성을 발휘했다. 동대문에서 구입한 고물 타자기로 퇴근해서 연습에 몰두하고 선배 사원에게 업무 관련 문서를 얻어 무역영어 등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서 1년 안에 나머지 4명을 자연 퇴사(?)시킨 덕분에 월급이 1만환에서 5만환으로 뛰기도 했다. 일을 배워 혼자 4명 몫의 일을 다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피죤 창업의 원동력이 됐던 곳이자 두 번째 직장인 동남합성에선 '영업맨'으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엔 대도시 중심의 무역노선을 따라 '브로커'라 불리던 중개인들이 유통망을 꽉 쥐고 있었어요. 물건을 팔려면 서울,부산의 브로커들을 잡아야 했습니다. 통행금지만 풀리면 새벽같이 집 앞에 찾아갔죠. 한 보름쯤 찾아가면 밥이나 먹자며 들어오라고 그래요. 이때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사장 될 때까진 명함을 안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내 이야기가 곧 회사 이야기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지 명함에 쓰인 직함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신용이 밑천이었죠. 한번 약속한 것은 철저히 지켰더니 나중엔 브로커들이 무역 정보를 들으려고 나를 먼저 찾곤 했어요."
◆40대에 세운 피죤
'영업맨'으로 잔뼈가 굵은 이 회장은 1979년 5월1일 마흔 다섯의 나이에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섬유유연제'. 나중에 '빨래엔 피죤'이란 유명한 광고 문구를 낳은 하늘빛 용기(이 회장은 '떫은 블루'라고 표현)의 피죤 제품이 나온 것. 1970년대 말 사람들이 섬유유연제를 알 리 만무했다. 테스트할 만한 시장이 아예 없던 터라 제품을 개발하면서 연구원의 아내들이 도맡아 모니터 역할을 했다. 남편들이 샘플을 갖고 퇴근해 집에 오면 여름철 망사 옷에서 겨울 모직 스웨터에 이르기까지 각종 빨랫감에 제품을 풀어가며 다음날 남편들에게 생생한 현장보고서를 제출한 것. 제품의 품질을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해 이화여대 등 당시 금남(禁男)의 지역도 숱하게 드나들며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블루오션'을 개척한 셈이다.
어려움도 많았다. "'이걸로 머리를 감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아주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갈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후부터 여자들이 세 명 이상 모이는 곳이면 모두 다 따라다녔을 정도로 영업에 매달렸습니다. 계 모임은 물론이고 성당,교회,반상회 등도 직원들이 샅샅이 훑었죠. 이때 우리 와이프가 얼굴 좀 붉혔을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피죤은 국내 섬유유연제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P&G 등 다국적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시장점유율 50%를 웃돌고 있는 것. 1996년엔 2억개 판매를 돌파했고,2003년 이마트가 선정한 생활용품 인기품목 1위를 차지했다. 오늘의 피죤을 일군 비결에 대해 이 회장은 "인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꼽는다.
"피죤은 1979년부터 차별 없이 공채를 통해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칙은 지켜지고 있고요. 널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지역주의,파벌주의,학벌주의예요. 청탁이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계속해서 거절해왔습니다. 제가 만든 사훈(社訓) 중에 '항진'(亢進·위세 좋게 나아간다는 의미)이란 게 있어요. 후배를 육성하는 것 없이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게 제 희망입니다. 80명 사원으로 출발한 회사가 30년 가까이 실력으로만 직원을 뽑은 것,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투자가 성공의 밑거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기자 donghuip@hankyung.com
이윤재 ㈜피죤 회장(73)은 항상 양복 상의 왼쪽에 비둘기 문양이 새겨진 피죤 브로치를 달고 다닌다. 세탁이라고 해 봐야 비누가 고작이었던 1970년대 섬유유연제란 생소한 '물건'을 팔았으며 다국적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알토란 같은 토종 기업을 지켜왔다는 자부심이 배어 있다.
샐러리맨으로 시작해 불혹이 넘은 나이에 피죤을 세운 지 벌써 29년,하지만 70대임에도 불구,그의 열정은 여느 젊은이에 비길 바가 아니었다. "지금도 매일 내일을 향해 뛰고 있다"는 그의 눈빛은 '형형하다'는 표현 그대로였다.
◆7남매 막둥이가 졸지에 독자(獨子)된 사연
이 회장의 삶은 '도전' 그 자체였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친형제들을 잃는 등 집안이 풍비박산 나기도 했고,스스로도 목숨을 잃을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 회장은 서울 토박이다. 할아버지가 정이품 당상관을 지냈을 정도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일찌감치 기업가의 길로 방향을 잡으셨다. 할아버지가 한·일 합방을 비관해 술로 날을 지새운 데다 일제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가산을 몰수당하자 선일운수란 운송회사를 차리고 기업가로 나선 것. 이 회장은 "선일운수는 피죤에 비하면 10배 정도 큰 회사였다"며 "청량리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한 시간가량 내려가면 원덕과 양동이란 마을이 나오는데 당시 이 일대 수백만평의 논밭이 우리 집 소유였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행복했던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일제 말기에 아버지 회사가 강제로 조선운수와 합병당한 데다 해방 후엔 미 군정에 의해 적산으로 분류돼 재산을 몽땅 몰수당한 것. 게다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형님과 누님들이 결핵으로 앓다가 6·25 전쟁이 터지면서 병세가 악화돼 유명을 달리했다. 7남매(3남4녀) 중 누나 한 명만 남고 모두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회장은 졸지에 장남이 됐다.
이 무렵,자칫하면 북한 인민군에 붙잡혀 갈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서울 양정고등학교 재학 시절 얘기다. "어느 날 학생 전원을 강당으로 소집하기에 가봤더니 팔에 완장 찬 사람들이 인민군 입대원서를 쓰라고 윽박지르더군요. 죽었다 싶었죠. 어찌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맨 앞에서 학생들을 지휘하는 좌익 간부가 평소 친하게 지내던 선배더라고요. 이때다 싶어 '형님'하면서 화장실 좀 다녀오게 해달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선뜻 보내줬습니다. 당시 학교 뒤에 산이 있었어요. 그 길로 도망쳐 아버지랑 집 마룻바닥에 들어가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 나와서 밥을 먹고 그랬습니다. 그때 인민군에 끌려갔던 친구들은 대부분 죽었을 겁니다."
◆무역회사 다니며 세상에 눈뜨다
이 회장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을 졸업하고 1957년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A.I. 메리트 앤 컴퍼니'란 무역회사에 친척 '빽'으로 들어가면서다. 직원 5명이 고작이고 사무실에 양초조차 없던 어려운 시절이었으나 이때 신용장 개설하는 것에서부터 세일즈까지 기본을 다 배웠다.
이 회장은 처음부터 남다른 승부 근성을 발휘했다. 동대문에서 구입한 고물 타자기로 퇴근해서 연습에 몰두하고 선배 사원에게 업무 관련 문서를 얻어 무역영어 등을 달달 외우기도 했다. 이렇게 하면서 1년 안에 나머지 4명을 자연 퇴사(?)시킨 덕분에 월급이 1만환에서 5만환으로 뛰기도 했다. 일을 배워 혼자 4명 몫의 일을 다 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필요 없어졌기 때문이다.
피죤 창업의 원동력이 됐던 곳이자 두 번째 직장인 동남합성에선 '영업맨'으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당시엔 대도시 중심의 무역노선을 따라 '브로커'라 불리던 중개인들이 유통망을 꽉 쥐고 있었어요. 물건을 팔려면 서울,부산의 브로커들을 잡아야 했습니다. 통행금지만 풀리면 새벽같이 집 앞에 찾아갔죠. 한 보름쯤 찾아가면 밥이나 먹자며 들어오라고 그래요. 이때 원칙이 하나 있었는데 '사장 될 때까진 명함을 안 만들겠다'는 것이었어요. 내 이야기가 곧 회사 이야기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중요하지 명함에 쓰인 직함은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신용이 밑천이었죠. 한번 약속한 것은 철저히 지켰더니 나중엔 브로커들이 무역 정보를 들으려고 나를 먼저 찾곤 했어요."
◆40대에 세운 피죤
'영업맨'으로 잔뼈가 굵은 이 회장은 1979년 5월1일 마흔 다섯의 나이에 자기 사업을 시작한다. 그가 들고 나온 것은 '섬유유연제'. 나중에 '빨래엔 피죤'이란 유명한 광고 문구를 낳은 하늘빛 용기(이 회장은 '떫은 블루'라고 표현)의 피죤 제품이 나온 것. 1970년대 말 사람들이 섬유유연제를 알 리 만무했다. 테스트할 만한 시장이 아예 없던 터라 제품을 개발하면서 연구원의 아내들이 도맡아 모니터 역할을 했다. 남편들이 샘플을 갖고 퇴근해 집에 오면 여름철 망사 옷에서 겨울 모직 스웨터에 이르기까지 각종 빨랫감에 제품을 풀어가며 다음날 남편들에게 생생한 현장보고서를 제출한 것. 제품의 품질을 인정해 줄 사람이 필요해 이화여대 등 당시 금남(禁男)의 지역도 숱하게 드나들며 관련 분야를 전공한 교수들을 찾아다녔다. 그야말로 '블루오션'을 개척한 셈이다.
어려움도 많았다. "'이걸로 머리를 감아도 되냐'고 묻더군요. 아주 예상 못 했던 것은 아니지만 갈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후부터 여자들이 세 명 이상 모이는 곳이면 모두 다 따라다녔을 정도로 영업에 매달렸습니다. 계 모임은 물론이고 성당,교회,반상회 등도 직원들이 샅샅이 훑었죠. 이때 우리 와이프가 얼굴 좀 붉혔을 겁니다."
천신만고 끝에 피죤은 국내 섬유유연제 시장을 석권하게 된다. P&G 등 다국적기업의 공세 속에서도 시장점유율 50%를 웃돌고 있는 것. 1996년엔 2억개 판매를 돌파했고,2003년 이마트가 선정한 생활용품 인기품목 1위를 차지했다. 오늘의 피죤을 일군 비결에 대해 이 회장은 "인재에 대한 과감한 투자"를 꼽는다.
"피죤은 1979년부터 차별 없이 공채를 통해 직원을 뽑고 있습니다. 지금도 원칙은 지켜지고 있고요. 널리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지역주의,파벌주의,학벌주의예요. 청탁이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계속해서 거절해왔습니다. 제가 만든 사훈(社訓) 중에 '항진'(亢進·위세 좋게 나아간다는 의미)이란 게 있어요. 후배를 육성하는 것 없이는 영원히 발전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에겐 그에 합당한 대가를 주는 조직을 만들겠다는 게 제 희망입니다. 80명 사원으로 출발한 회사가 30년 가까이 실력으로만 직원을 뽑은 것,다시 말해 사람에 대한 믿음과 투자가 성공의 밑거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박동휘 한국경제신문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