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중앙대 정경대학장ㆍ경제학 >

☞한국경제신문 6월 14일자 A39면

올해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이를 맞아 또다시 우리 경제의 위기발생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지난번과 같은 외환위기가 재연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무엇보다도 우리 경제의 투명성이 크게 증대됐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의 정책결정 과정이 보다 투명해졌다. 지난 외환위기 당시 과장된 외환보유액 발표로 곤욕을 치른 정부에서는 정확한 통계자료를 작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 통계자료는 국제통화기금의 모범으로 꼽힐 만큼 투명해졌다. 기업부문에는 사외이사제도를 도입하고,외부감사제도와 내부통제제도를 강화하거나 회계기준을 엄격히 집행해 투명성이 크게 향상됐다. 또한 외환위기 당시 300%를 넘던 부채비율도 100% 선에서 안정됐다. 최근 상장(上場)을 앞두고 있는 한 국내 대기업이 외국인 주식투자 유치를 위해 벌인 해외 로드쇼 결과 해외투자자에게 배정된 금액의 수십 배에 달하는 투자의사를 받았다고 한다. 당분간은 지난번과 같이 우리 경제의 불투명성을 이유로 외국 자금이 일시에 이탈하는 일은 없을 것 같다.

현재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2500억달러가 넘는다. 이는 설령 외국자본이 갑자기 대규모로 이탈하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해도 이를 방어할 충분한 실탄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이것으로도 불충분한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우리 총외채가 2600억달러를 넘어섰고 단기외채도 1100억달러에 이른다. 우리 주식시장에서 유통주식의 외국인 보유비율이 60%가 넘는다. 이들 자금이 일시에 모두 이탈하면 아무리 외환보유액이 많아도 견뎌낼 수 없다. 북핵 문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전쟁 가능성이 높아지면 그럴 수도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는 경우다. 전 세계적인 과잉 유동성이 초래한 자산 버블이 꺼지면서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소비와 투자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세계경제가 대혼란에 빠져들 수 있다. 이런 경우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고 따라서 이에 대한 대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가 계속 높아지고 있다. 무역액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인 대외의존도가 외환위기 당시 50% 선에서 작년에는 70%를 넘어섰다. 이 중에서도 특히 우리 경제의 중국 의존도가 커지고 있다. 같은 기간 우리 수출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9%에서 22%로 증가했다. 그러므로 연 10%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중국경제가 갑자기 경착륙하면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지역적 무역대상을 다변화해 특정지역 의존에 따른 위험을 축소할 필요가 있다. 최근 타결된 한·미 FTA와 협상 중인 한·EU FTA가 성사되면 무역 대상 다변화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대외의존도 증가는 우리 경제가 그만큼 세계경제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 몇 년간 우리 경제는 세계 평균 성장률에도 못 미치는 저성장을 기록했다. 그런데 그나마 이를 주도한 것이 수출이다. 이로 인해 대외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외부충격에 따른 우리 경제의 위험도를 줄이기 위해서는 대외의존도를 낮춰야 하는데,이는 내수비중을 늘려야 가능하다.

내수산업의 주종은 서비스산업이다. 그런데 우리 서비스산업은 침체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산업에 관한한 토지 세제 등 각종 규제가 얽혀 있어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다. 최근 신세계가 세계적 프리미엄 아울렛인 첼시와 손잡고 경기도 여주에 명품 아울렛을 개장해 화제가 됐다. 하루 이용객이 예상치의 2배를 넘는다고 한다. 이 같은 쇼핑 관광객 증가로 지역경제 활성화가 기대된다고 한다. 그런데 아울렛 두 동(棟) 가운데 하나는 명칭이 신세계첼시아울렛이고 다른 한 동은 그냥 신세계아울렛이라고 한다. 자연보전권역에서는 판매시설이 1만5000㎡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수도권정비계획법 때문에 법인이 두 개로 쪼개졌다고 한다. 규제에 얽매여 큰 그림은 보지 못하고 이를 답습하는 한 경쟁력 강화는 불가능하다. 서비스산업과 관련된 모든 규제완화는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

해설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고"…'눈가리고 아웅'식 규제 언제까지

지난 1일 문을 연 경기도 여주 신세계첼시아울렛이 이래저래 화제다. 개장 첫날 5만명이 몰렸느니,일부 매장은 물건이 동났는니,여주지역 상권이 유망하느니…. 사실 이 아울렛이 눈길을 끈 것은 개장 전부터다. 규제와 현실 사이에서 어떤 결과를 빚어내는가 하는 프로세스를 여실히 보여줬기 때문이다.

건설교통부는 올초 아울렛 공사가 한창일 때 자연보전권역에선 판매시설이 1만500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한 수도권정비계획법과 상충된다는 점을 들어 제동을 걸었다. 건교부는 이 아울렛이 위법이라며 여주군에 시정을 요구했고,여주군은 아울렛의 두 건물 사이에 도로가 지나가 한 건물로 볼 수 없다며 공사를 계속하도록 허가했다.

결국 아울렛 운영 당사자인 신세계첼시는 고민끝에 건축주 명의 변경으로 고비를 넘겼다. 건물 2개 동(합치면 약 2만7000㎡) 가운데 1개 동의 건축주를 신세계첼시에서 신세계로 바꿔 따로 준공한 뒤 다시 임차해 쓰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쪽은 신세계첼시아울렛,다른 한쪽은 신세계아울렛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다. 이를 두고 "꼼수다""묘수다" 또는 "편법이다""불가피했다" 등 다양한 시각에서 논란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 신세계첼시아울렛의 해프닝은 우리나라 규제와 이를 집행하는 정부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준다. 처음부터 규제하려면 제대로 하든지,허용할거면 제동을 걸지 말든지 했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아닌 꼴이 됐다. 우리나라 규제가 갖고 있는 문제점은 △법규 자체의 경직성 △빠져나갈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허점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공무원 재량권 등으로 요약된다. 이번 사례는 이런 문제점을 보여주는 종합선물세트인 셈이다. 이는 외국 기업인들에게 한국 공무원에 대한 불만을 물었을 때 '되는 것도 없고,안 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첫 손가락에 꼽은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홍기택 중앙대 경영대학장은 이 칼럼에서 외환위기 10주년을 맞아 거시경제적 성과는 다양하지만 내수(특히 서비스산업)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신세계첼시아울렛 사례를 빗대 설명한다. 규제에 얽매여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얽히고 설킨 규제에 기업의 운신 폭은 좁아드는 게 현실이란 얘기다. 기업 규제가 도로 위 함정단속과 비슷해 누구든 걸리면 첫 반응이 "에이,재수 없어"로 나오는 식이 아닐까?

따라서 기업이 원하는 규제완화란 모든 규제를 다 없애라는 뜻이 아니다. 규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하고,지킬 수 있게 현실화하며,안 지켰을 때 처벌을 분명히 해서 누구나 예측가능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이와 함께 국민들의 법에 대한 정서면에서도 한국인들은 미국 등 서구인들과 큰 차이가 있다. 서구인들은 법을 '지켜야 할 최소한'으로 규정해놓고 안 지키면 엄벌에 처한다. 예컨대 시위대가 폴리스라인을 넘는 순간 미국,유럽의 경찰은 인정사정 없다. 시위대에 매맞는 한국의 경찰과 비교해보라.

반면 한국인에게 법은 '지키면 좋고 안 지켜도 안 걸리면 그만'이다. 법 자체가 이상적인 도덕률을 규정하고 있어 지키기도 어렵고,법 집행에도 일관성이 없고,예외조항이 너무 많다. 그래서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헌법 위의 국민정서법,그 위에 떼법'이 존재한다는 비아냥을 듣는다. 무수한 예외조항을 둘 바엔 해당 규제를 없애고,하지 말아야 할 것만 규정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는 게 바람직하다. 대신 이것마저 어기면 예외없이 처벌하되,공무원 재량권도 없애야 한다. 기업인들이 꼽는 사상 최악의 규제는 '공무원 맘대로'이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가기 위해 절실한 것은 '법 없이도 살 국민'이 아니라 '법 잘 지키는 국민'이 아닐까?

오형규 한국경제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