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카리스마가 엄청난 힘 발휘한다
"한국군을 믿지 않는 미군들에게 욕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영어가 자연스레 늘었죠."
김영종 비자코리아 사장(62)은 35년 넘는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보냈다. 1971년 체이스맨해튼 은행(현 JP모건)에 들어가 1986년 체이스맨해튼 투자금융 대표를 거쳐 푸르덴셜생명 사장까지 항상 마음에 드는 직장을 골라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 비자코리아 대표로도 10년째 재직 중이다. 김 사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특유의 뚝심과 열정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유창한 영어가 뒷받침됐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1945년 태어나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그가 영어를 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김 사장은 서슴없이 '깡'이라고 말한다. 김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성공회 교회를 다녔다. 거기서 영국인 신부로부터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외국인 평화봉사단을 안내하는 모임을 만들어 거기서 가이드 역할을 하며 자연스레 영어와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사장의 영어가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때는 군 복무 시절.
김 사장은 1966년 미군 첩보부대에 들어가 미국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부대 인원 150명 중 한국군은 20명에 불과했다. 김 사장은 거기서 한국군을 변호하고 한국군을 믿지 않는 미군들에게 욕을 서슴지 않았다. 김 사장은 "미군들에게 하도 욕을 해대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가 늘었다"며 "군대에서 'f'로 시작하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다른 건 몰라도 욕은 원어민한테도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김 사장은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후 체이스맨해튼에 들어가 시험을 통해 뉴욕 본사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김 사장은 뉴욕에서 고급 영어를 익혔다. 그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문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문법을 완전히 까먹어야 영어를 잘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I want to go home'이라고 안 하고 'I go home want'라고만 해도 다 알아듣잖아요." 그리고 김 사장은 영어를 반드시 써야 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군대에서 미군들을 상대하고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한 것도 모두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영어가 유창했던 김 사장이 외국계 회사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룰을 깨는 게 자신의 스타일이었지만 한국 기업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로열 패밀리나 오너의 측근도 아닌데 외국 회사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폼'도 잡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 사장의 좌우명은 '적자생존'이다.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적자생존이 아니다. 김 사장은 이 말을 '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김 사장은 지난 20여년간 쓴 노트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 속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과 문득문득 스쳐간 생각들이 적혀 있다. 네 칸의 서랍을 빼곡이 채운 노트를 보면 흐뭇하다고 한다. 자신의 기록들을 볼 때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하고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이사하거나 청소할 때마다 노트를 모두 챙겨야 한다는 점. 그래서 김 사장은 딸에게 그 노트들을 컴퓨터 파일로 전환해 CD에 담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딸이 글씨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부 영어로 써 있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쉽지 않다. 김 사장은 "제가 노트에 쓴 영어는 저만 알아볼 수 있어 나중에 책을 쓸 때 좋은 자료로 활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메모광이면 으레 부지런하고 행동도 무척 빠를 것으로 짐작되지만 김 사장은 정반대다. 김 사장의 별명은 '드문드문'이다. 실제 행동이 너무 느려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천천히 행동하며 여유를 가지려 노력해서인지 김 사장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배어 있다. 그는 특히 '긍정의 카리스마'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한다. 부하 직원들에게 절대 야단치는 법이 없다. 오히려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쓴다. 김 사장이 비자코리아에 첫 출근한 날 직원들은 모두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김 사장은 직원들에게 그러지 말도록 주문했다.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수직적인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 사장은 자신이 들어올 때 또 일어나는 직원은 월급을 깎겠다고 엄포를 놔 어렵사리 문화를 바꿀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멘토(mentor)로 서슴없이 어머니를 꼽는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품어 준 바다였고 갈 길을 제시해 준 등대였다. 어머니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다섯 아들을 떳떳하게 키웠다. 평생 좌우명처럼 가슴에 담고 사는 금언도 어머니가 해 준 말이다. "절대 남들한테 애비 없는 호래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라"는 것이다. 김 사장은 이 말을 통해 '자기 규율'을 배웠다고 한다. "호래자식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빗나갈 듯하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어머니는 다섯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장사를 했다.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로 성공해 사업 규모를 계속 키워 나갔다. 그즈음 김 사장은 어머니 친구들인 동대문 상인들에게 '삼강 하드'를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물론 시련도 없지 않았다. 한 번은 교포 사업가가 어머니에게 가네보 나일론을 독점 판매하게 해 주겠다고 접근해 허위 계약서를 쓰고 돈만 받아 달아났다. 그 일로 빚을 지게 돼 어린 형제들은 매일 집안에 빚쟁이들과 빨간 압류 딱지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위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
김 사장은 어머니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갖고 있다. 임종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홍콩에서 근무할 때 어머니는 운명을 달리하셨다. 김 사장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 전화기를 계속 들고 있으면서 마지막을 함께했지만 곁에 있지 못했던 것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또 18년간 몸담은 체이스맨해튼에도 감사해한다. 그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8월. 홍콩에서 근무하던 김 사장은 잠시 서울로 들어와 휴가를 보내다가 친구와 부부 동반으로 교외로 나가다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친구가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몰던 차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미끄러져 가드 레일을 받았고 고속버스가 뒤에서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는 즉사하지 않은 게 다행일 뿐 목뼈가 손상되고 힘줄이 대부분 끊어져 자칫 전신마비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위기였다.
김 사장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바로 체이스맨해튼이었다. 이 은행은 캐세이패시픽 비행기의 1등석을 전부 뜯어내고 응급 병실로 개조해 김 사장을 영국으로 공수했다. 다행히 신경을 크게 다치지 않아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김 사장은 3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체이스맨해튼이 정말 고마웠는데 알고 보니 모두 보험으로 처리했더라"며 크게 웃었다.
정인설 한국경제 기자 surisuri@hankyung.com
"한국군을 믿지 않는 미군들에게 욕을 하도 많이 하다 보니 영어가 자연스레 늘었죠."
김영종 비자코리아 사장(62)은 35년 넘는 직장 생활의 대부분을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보냈다. 1971년 체이스맨해튼 은행(현 JP모건)에 들어가 1986년 체이스맨해튼 투자금융 대표를 거쳐 푸르덴셜생명 사장까지 항상 마음에 드는 직장을 골라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 비자코리아 대표로도 10년째 재직 중이다. 김 사장이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특유의 뚝심과 열정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 유창한 영어가 뒷받침됐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1945년 태어나 직장에 들어가기 전까지 해외에 나가 본 적이 없는 그가 영어를 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김 사장은 서슴없이 '깡'이라고 말한다. 김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성공회 교회를 다녔다. 거기서 영국인 신부로부터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는 외국인 평화봉사단을 안내하는 모임을 만들어 거기서 가이드 역할을 하며 자연스레 영어와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김 사장의 영어가 일취월장할 수 있었던 때는 군 복무 시절.
김 사장은 1966년 미군 첩보부대에 들어가 미국과 한국인들 사이에서 통역하는 일을 맡았다. 부대 인원 150명 중 한국군은 20명에 불과했다. 김 사장은 거기서 한국군을 변호하고 한국군을 믿지 않는 미군들에게 욕을 서슴지 않았다. 김 사장은 "미군들에게 하도 욕을 해대다 보니 자연스레 영어가 늘었다"며 "군대에서 'f'로 시작하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다른 건 몰라도 욕은 원어민한테도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고 털어놨다.
김 사장은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졸업 후 체이스맨해튼에 들어가 시험을 통해 뉴욕 본사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김 사장은 뉴욕에서 고급 영어를 익혔다. 그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문법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강조한다. "문법을 완전히 까먹어야 영어를 잘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I want to go home'이라고 안 하고 'I go home want'라고만 해도 다 알아듣잖아요." 그리고 김 사장은 영어를 반드시 써야 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군대에서 미군들을 상대하고 외국계 금융회사에서 일한 것도 모두 영어를 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영어가 유창했던 김 사장이 외국계 회사를 선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룰을 깨는 게 자신의 스타일이었지만 한국 기업에서는 그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로열 패밀리나 오너의 측근도 아닌데 외국 회사에서 근무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폼'도 잡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김 사장의 좌우명은 '적자생존'이다.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일반적인 의미의 적자생존이 아니다. 김 사장은 이 말을 '적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쓰고 있다. 김 사장은 지난 20여년간 쓴 노트들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그 속에는 자신이 겪은 일들과 문득문득 스쳐간 생각들이 적혀 있다. 네 칸의 서랍을 빼곡이 채운 노트를 보면 흐뭇하다고 한다. 자신의 기록들을 볼 때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구나' 하고 깜짝깜짝 놀란다고 한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이사하거나 청소할 때마다 노트를 모두 챙겨야 한다는 점. 그래서 김 사장은 딸에게 그 노트들을 컴퓨터 파일로 전환해 CD에 담아 달라고 부탁했지만 거절당했다. 딸이 글씨를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부 영어로 써 있어 다른 사람에게 맡기기도 쉽지 않다. 김 사장은 "제가 노트에 쓴 영어는 저만 알아볼 수 있어 나중에 책을 쓸 때 좋은 자료로 활용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메모광이면 으레 부지런하고 행동도 무척 빠를 것으로 짐작되지만 김 사장은 정반대다. 김 사장의 별명은 '드문드문'이다. 실제 행동이 너무 느려 붙여진 별명이다. 하지만 천천히 행동하며 여유를 가지려 노력해서인지 김 사장의 얼굴에는 늘 웃음이 배어 있다. 그는 특히 '긍정의 카리스마'가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강조한다. 부하 직원들에게 절대 야단치는 법이 없다. 오히려 편안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힘쓴다. 김 사장이 비자코리아에 첫 출근한 날 직원들은 모두 벌떡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김 사장은 직원들에게 그러지 말도록 주문했다.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수직적인 문화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 사장은 자신이 들어올 때 또 일어나는 직원은 월급을 깎겠다고 엄포를 놔 어렵사리 문화를 바꿀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멘토(mentor)로 서슴없이 어머니를 꼽는다. 어머니는 항상 자신을 품어 준 바다였고 갈 길을 제시해 준 등대였다. 어머니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은 미망인으로 다섯 아들을 떳떳하게 키웠다. 평생 좌우명처럼 가슴에 담고 사는 금언도 어머니가 해 준 말이다. "절대 남들한테 애비 없는 호래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해라"는 것이다. 김 사장은 이 말을 통해 '자기 규율'을 배웠다고 한다. "호래자식 소리를 듣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빗나갈 듯하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게 김 사장의 설명이다.
어머니는 다섯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장사를 했다.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로 성공해 사업 규모를 계속 키워 나갔다. 그즈음 김 사장은 어머니 친구들인 동대문 상인들에게 '삼강 하드'를 팔아 돈을 벌기도 했다. 물론 시련도 없지 않았다. 한 번은 교포 사업가가 어머니에게 가네보 나일론을 독점 판매하게 해 주겠다고 접근해 허위 계약서를 쓰고 돈만 받아 달아났다. 그 일로 빚을 지게 돼 어린 형제들은 매일 집안에 빚쟁이들과 빨간 압류 딱지가 늘어나는 것을 보고 살아야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위 지인들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섰다.
김 사장은 어머니에게 죄송스런 마음을 갖고 있다. 임종을 곁에서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홍콩에서 근무할 때 어머니는 운명을 달리하셨다. 김 사장은 "어머니께서 돌아가시는 날 전화기를 계속 들고 있으면서 마지막을 함께했지만 곁에 있지 못했던 것이 항상 마음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또 18년간 몸담은 체이스맨해튼에도 감사해한다. 그 덕분에 '제2의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8월. 홍콩에서 근무하던 김 사장은 잠시 서울로 들어와 휴가를 보내다가 친구와 부부 동반으로 교외로 나가다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친구가 시속 100㎞가 넘는 속도로 몰던 차가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미끄러져 가드 레일을 받았고 고속버스가 뒤에서 그대로 들이받았다. 그는 즉사하지 않은 게 다행일 뿐 목뼈가 손상되고 힘줄이 대부분 끊어져 자칫 전신마비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위기였다.
김 사장을 절망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바로 체이스맨해튼이었다. 이 은행은 캐세이패시픽 비행기의 1등석을 전부 뜯어내고 응급 병실로 개조해 김 사장을 영국으로 공수했다. 다행히 신경을 크게 다치지 않아 수술은 대성공이었다. 김 사장은 3개월 동안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스스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김 사장은 "체이스맨해튼이 정말 고마웠는데 알고 보니 모두 보험으로 처리했더라"며 크게 웃었다.
정인설 한국경제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