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한곡 불러도 '몸을 던져' 불러라"
#장면 하나. 19살 꿈 많던 학창 시절,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무역회사가 무너졌고 대학 진학은 수포로 돌아갔다.
집에 돈이 없어 아버지의 머리를 직접 깎아드려야 할 정도였다.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을 원망하며 보내다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학비를 마련했다.
부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장면 둘. 올해로 60세. 명함에 박힌 '부회장' 글씨가 빛난다.
그가 맡고 있는 회사는 3년 연속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아들 둘은 모두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건강을 생각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을 뛴다.
아침은 과일과 고구마로 가볍게 해결하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달라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는 모두 한 사람이 겪어온 인생이다.
LS산전의 김정만 부회장(60).
그는 "어떤 일에 미쳐 버리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뜻의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노래 한 곡을 불러도 '몸을 던져' 부른다.
원하지 않는 일을 맡게 되더라도 일단 최선을 다한다.
기회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동력을 힘들었던 3년에서 찾아냈다.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에 들어갔잖아요.
적응이 힘들었죠.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남들보다 늦었는데, 실력을 빨리 쌓아야겠다 싶었죠. 공부를 많이 했어요."
대학 졸업 후 LG화학에 입사해 맡은 일이 재무 관련 업무였다.
재무보다는 영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맡은 일에서 먼저 최고가 되자"며 입을 악다물었다.
업무를 익히기 위해 두꺼운 세법책을 잘라서 갖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재무 담당 직원은 회사 내 모든 회의에 참석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회사 전체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회사 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깨알같이 노트에 적어 나왔다.
그러면서 점차 '재무통'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기업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그에게 퇴출기업 하나가 맡겨졌다.
LG화학에서 재무담당 이사(CFO)로 지내던 김 부회장은 구조조정을 위해 LS산전(당시 LG산전)으로 옮겨왔다.
첫 부임연도인 1999년의 부채비율은 1366%. 당시 LS산전은 퇴출대상 1호로 손꼽힐 정도로 재정 상태가 취약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내고 싶어서 자료를 들고 은행을 돌아다녔어요.
나만 쳐다보고 있는 눈이 5600개인데 밤에 잠도 안 왔죠.2시간마다 깨곤했어요."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게 된 그는 먼저 동제련 사업과 엘리베이터 사업부문 등 부실사업을 털어냈다.
이후 사장직에 올라서는 영업사원들에게 영업전략을 바꾸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재무 관련 일만 해 제품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영업을 말한다"는 비난이 들려왔다.
안면을 트고 지내던 임원들도 등을 돌렸다.
"여기는 화학이 아니라 산전"이라며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그에게 "설친다"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제품이나 기술을 모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수능 공부하듯이 밤잠 안 자고 공부했어요.
처음 3개월은 힘들었는데 3년이 지나니까 직원들이 제 뜻을 이해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하나둘 바꿔가다 보니 2004년에는 매출 1조원을 넘기며 흑자로 돌아섰다.
월급쟁이로 34년을 지내오면서 제일 보람을 느낀 일은 '퇴출 대상인 회사를 살렸다'는 자부심이다.
성공 비결을 "노력밖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했던 그는 첫 휴가를 부장이 된 뒤에야 다녀올 정도였다.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로 살다보니 웃지 못할 오해도 받았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결산 때가 되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장모님이 나서셨다.
"김 서방이 바람이 났나 보다.
아침 일찍 회사에 전화해 보라"고 해 아내가 이튿날 회사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김 부회장은 그때를 "가정과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소문난 메모광이기도 하다.
분류도 다양하다.
회사일과 관련된 그의 '메모 스타일'은 아예 회사 전 직원의 업무수첩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건강, 음식, 유머, 와인 등 '정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죄다 수첩에 적어둔다.
김 부회장은 최선을 다해 일을 하다 보면 결과는 저절로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가며 전략적으로 일을 하면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통찰력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재무 담당인 CFO에게도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주문합니다.
한번 기회를 포착하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은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야 하지요."
그는 임원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으로 통찰력과 평형감각을 꼽았다.
본인이 잘하는 것만큼 직원들을 자기 못지않은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선 "기존 관념을 깨버리라"고 주문했다.
"5년 전만 해도 모두 우리회사는 끝났다고 했어요.
희망이 없다고 내놓은 자식 취급을 했지만 지금은 제일 잘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얼마든지 있는데 미리 포기하면 실패하는 겁니다."
부회장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끝없이 사업에 대한 열정을 털어놨다.
필요하다면 해외기업의 인수·합병(M&A)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는 현재 26%인 LS산전의 수출 비중이 2009년도에는 40%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매년 매출액 대비 4.8%를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있는 만큼 자신 있다는 설명이다.
김 부회장은 "개인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무한하다"며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회장으로서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꿈을 이렇게 풀이했다.
"나로 인해 회사가 잘 됐다는 평가를 듣게 되고,혹여 나중에 회사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면 아주 행복할 것 같습니다."
김현예 한국경제신문사 산업부 기자 yeah@hankyung.com
#장면 하나. 19살 꿈 많던 학창 시절,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사정은 여의치 않았다.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무역회사가 무너졌고 대학 진학은 수포로 돌아갔다.
집에 돈이 없어 아버지의 머리를 직접 깎아드려야 할 정도였다.
도무지 앞길이 보이지 않았다.
3년이라는 시간을 원망하며 보내다 친척의 도움으로 겨우 학비를 마련했다.
부산대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장면 둘. 올해로 60세. 명함에 박힌 '부회장' 글씨가 빛난다.
그가 맡고 있는 회사는 3년 연속 1조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문대를 졸업한 아들 둘은 모두 번듯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건강을 생각해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집 근처 학교 운동장을 뛴다.
아침은 과일과 고구마로 가볍게 해결하고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회사로 출근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다.
달라 보이는 두 개의 이야기는 모두 한 사람이 겪어온 인생이다.
LS산전의 김정만 부회장(60).
그는 "어떤 일에 미쳐 버리지 않으면 이르지 못한다"는 뜻의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
노래 한 곡을 불러도 '몸을 던져' 부른다.
원하지 않는 일을 맡게 되더라도 일단 최선을 다한다.
기회는 뜻하지 않는 곳에서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동력을 힘들었던 3년에서 찾아냈다.
"남들보다 3년이나 늦게 대학에 들어갔잖아요.
적응이 힘들었죠.그런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남들보다 늦었는데, 실력을 빨리 쌓아야겠다 싶었죠. 공부를 많이 했어요."
대학 졸업 후 LG화학에 입사해 맡은 일이 재무 관련 업무였다.
재무보다는 영업을 해보고 싶었지만 "맡은 일에서 먼저 최고가 되자"며 입을 악다물었다.
업무를 익히기 위해 두꺼운 세법책을 잘라서 갖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재무 담당 직원은 회사 내 모든 회의에 참석토록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회사 전체 업무를 파악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회사 내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회의에 들어갈 때마다 깨알같이 노트에 적어 나왔다.
그러면서 점차 '재무통'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기업들이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하자 그에게 퇴출기업 하나가 맡겨졌다.
LG화학에서 재무담당 이사(CFO)로 지내던 김 부회장은 구조조정을 위해 LS산전(당시 LG산전)으로 옮겨왔다.
첫 부임연도인 1999년의 부채비율은 1366%. 당시 LS산전은 퇴출대상 1호로 손꼽힐 정도로 재정 상태가 취약했다.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내고 싶어서 자료를 들고 은행을 돌아다녔어요.
나만 쳐다보고 있는 눈이 5600개인데 밤에 잠도 안 왔죠.2시간마다 깨곤했어요."
구조조정의 칼자루를 쥐게 된 그는 먼저 동제련 사업과 엘리베이터 사업부문 등 부실사업을 털어냈다.
이후 사장직에 올라서는 영업사원들에게 영업전략을 바꾸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재무 관련 일만 해 제품이나 기술에 대해서는 모르면서 영업을 말한다"는 비난이 들려왔다.
안면을 트고 지내던 임원들도 등을 돌렸다.
"여기는 화학이 아니라 산전"이라며 사업구조를 재편하는 그에게 "설친다"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제품이나 기술을 모르면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수능 공부하듯이 밤잠 안 자고 공부했어요.
처음 3개월은 힘들었는데 3년이 지나니까 직원들이 제 뜻을 이해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렇게 하나둘 바꿔가다 보니 2004년에는 매출 1조원을 넘기며 흑자로 돌아섰다.
월급쟁이로 34년을 지내오면서 제일 보람을 느낀 일은 '퇴출 대상인 회사를 살렸다'는 자부심이다.
성공 비결을 "노력밖에는 없다"고 할 정도로 자신에게 철저했던 그는 첫 휴가를 부장이 된 뒤에야 다녀올 정도였다.
일밖에 모르는 '일벌레'로 살다보니 웃지 못할 오해도 받았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에는 결산 때가 되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가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장모님이 나서셨다.
"김 서방이 바람이 났나 보다.
아침 일찍 회사에 전화해 보라"고 해 아내가 이튿날 회사로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김 부회장은 그때를 "가정과 회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소문난 메모광이기도 하다.
분류도 다양하다.
회사일과 관련된 그의 '메모 스타일'은 아예 회사 전 직원의 업무수첩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다.
건강, 음식, 유머, 와인 등 '정보'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죄다 수첩에 적어둔다.
김 부회장은 최선을 다해 일을 하다 보면 결과는 저절로 좋아진다고 믿는 사람이다.
"매사에 최선을 다해가며 전략적으로 일을 하면 결과는 좋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통찰력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재무 담당인 CFO에게도 시야를 넓게 가지라고 주문합니다.
한번 기회를 포착하면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사람은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야 하지요."
그는 임원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덕목으로 통찰력과 평형감각을 꼽았다.
본인이 잘하는 것만큼 직원들을 자기 못지않은 최고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는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선 "기존 관념을 깨버리라"고 주문했다.
"5년 전만 해도 모두 우리회사는 끝났다고 했어요.
희망이 없다고 내놓은 자식 취급을 했지만 지금은 제일 잘하고 있습니다.
시장은 얼마든지 있는데 미리 포기하면 실패하는 겁니다."
부회장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끝없이 사업에 대한 열정을 털어놨다.
필요하다면 해외기업의 인수·합병(M&A)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그는 현재 26%인 LS산전의 수출 비중이 2009년도에는 40%까지 높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매년 매출액 대비 4.8%를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있는 만큼 자신 있다는 설명이다.
김 부회장은 "개인은 유한하지만 기업은 무한하다"며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회장으로서의 몫"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전문경영인으로서의 꿈을 이렇게 풀이했다.
"나로 인해 회사가 잘 됐다는 평가를 듣게 되고,혹여 나중에 회사에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참석해 자리를 빛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면 아주 행복할 것 같습니다."
김현예 한국경제신문사 산업부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