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를 그리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그래! 내가 고정관념에 사로잡혔군"

초현실주의(surrealism) 미술 하면 가장 먼저 드넓은 황무지가 떠오른다.

메마른 들녘 한가운데 드문드문 외롭게 죽어가는 고목, 그리고 그 가지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열에 녹아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계, 사막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다 기력이 쇠잔해진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어느 고독한 방랑자를 연상시킨다.

보통 사람의 한계를 훨씬 넘어선,그래서 꿈에서도 보기 힘든 비현실적인 세계를 묘사한 미술, 바로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의 삭막하기만 한 그림 세계다.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이면서도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1898~1967)의 작품 세계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일견 극사실주의, 또는 구상주의에 더 가까운 작가가 아닌가 싶다.

오래전, 캔버스 위에 담배 파이프만 꽉 차게 그려놓고는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쓴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그야말로 황당했던 기억이 난다.

'담배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니…. 복잡하기보다는 너무 단순한 그림인데, 작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고자 한 것일까?'

한동안 고민하고 있는데 불현듯 '그렇지! 실제 파이프가 아니고, 파이프를 그린 그림일 뿐이라는 얘기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마치 득도(得道)라도 한 듯 거대한 환희가 밀려오는 걸 느꼈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발상의 전환이라고 하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필자는 거장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들를 때마다 그의 작품 한두 점은 꼬박꼬박 챙겨 감상하는 걸 큰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던 중 수년 전, 파리 주드폼 미술관에서 개최한 대대적인 르네 마그리트 작품전을 통해 그의 초기부터 전성시대를 거쳐 말기까지의 작품 세계를 한눈에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 전시회에서 '통찰(La Clairvoyance)'(1936년 작)을 마주했을 때 필자는 다시 한번 감탄의 기쁨을 느꼈다.

화가가 책상 위에 놓인 새알을 보면서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정작 그리고 있는 것은 새알이 아니라 날아가는 새가 아닌가….이것이야말로 흔히들 말하는 '통찰'이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왜 평론가들이 수많은 화가 중에서도 르네 마그리트를 가장 시정적(詩情的)이고,철학적인 작가라고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르네 마그리트 작품전을 보며 필자는 그동안 이뤄진 나와 마그리트의 인연을 새삼 돌아볼 기회를 얻었다.

그의 '회귀(The Return)'(1940년 작)를 보면서 나 자신에게 물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날고 있는 큰 새 한 마리와 사람 눈에 쉽게 띄는 곳에 놓인 작은 둥지는 무엇을 말하는 걸까? 둥지를 찾아 멀리서 날아오는 어미 새의 불안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둥지를 찾아 캄캄한 하늘을 헤매는 새일까?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해석의 공간을 주는 마그리트의 수작(秀作)이 아닐까 싶다.

도저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을 묘사한 작가의 의도는 무엇일까? 혹 이 세상의 이율배반에 대해 말하고 싶은 건 아닐까? 이번 서울 전시는 거장 마그리트가 이룩한 격(格)에 소홀함 없이 기획되었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갖게 한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작품 한두 점만봐아도 보람된 일인데,많은 작품과 함께 각종 사진,스케치,일화가 담긴 사료들까지 만날 수 있어 마그리트의 자서전을 읽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거장들의 기획전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지 말고 모든 사람이 미술관을 찾았으면 한다.

되도록이면 많은 중·고생과 젊은이들이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를 통해 '창조(creative)의 시작은 어려운 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발상의 전환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면 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경직된 흑백논리의 틀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파블로 피카소는 추상미술의 대가답게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이와 달리 르네 마그리트는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만 그린다"고 했다.

실제로 마그리트의 작품에 나타난 오브제 하나하나는 여느 사실화처럼 정성 들여 그린 세필화(細筆畵) 못지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그림에 머물러 있는 순간에도 생각은 분망히 상상의 세계를 떠돌아다니게 한다.

마그리트의 작품 세계를 떠받치는 한 가지 키워드는 '발상의 전환'이다.

여기서 문득 윤동주 시인의 시 '나무'(1937년 작)가 떠오르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이 자오.

윤동주의 시가 아름다운 것은 우선 시어(詩語) 자체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지만,무엇보다 시상(詩想)에 담긴 '발상의 전환'이 아름다움을 배가해 주기 때문이다.

화가 르네 마그리트와 윤동주 시인에게서 동일한 맥이 읽혀지는 건 단지 필자만의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