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26)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
윤영달 크라운·해태제과 회장(62)은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이 삶의 위기를 넘기는 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선친에게서 사업을 물려받은 경영 2세라 1세대 만큼의 뼈저린 배고픔을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어려운 고비를 만날 때마다 걱정보다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버틴 것이 지금의 윤 회장을 있게 한 원동력이다.

윤 회장은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제과점을 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큰 어려움 없이 자랐다.

아버지가 제과업을 하셨지만 그는 유난히 기계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사업을 물려받지 않았다면 분명히 자전거포 주인이 됐을 거예요.

기계 다루는 걸 어려서부터 즐겼거든요."

대학 전공도 물체의 움직임을 공부할 수 있는 물리학과로 결정했다.

윤 회장이 처음 경영 일선으로 뛰어든 것은 그가 25세 되던 1971년.처음으로 회사 전반적인 일에 참여하는 것이었지만,아버지는 윤 회장의 여러 아이디어를 믿고 채택해줬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중간 도매상 체제를 없앤 일이다.

그는 우연히 동대문 방산시장에 시장 조사를 하러 나갔을 때 중간 도매상들이 크라운제과의 '산도'가 아닌 타사 제품을 소매상들에게 권하는 장면을 보고 중간 도매체계를 없애야 겠다고 생각했다.

우선 직원 네 명을 데리고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가 새로운 유통 체계를 실험해 보기 좋은 독립 상권이어서 였다.

직원들과 함께 리어카에 물건을 싣고 소매상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매 상인들 입장에서는 제과업체가 직접 상품을 팔러오는 것이 익숙지 않았던 탓에 처음에는 경계심만 보일 뿐이었다.

제품이 팔리지 않자 전략을 바꿨다.

상인들을 만나자마자 팔려고 하지 말고 우선은 그들과 친해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후로 소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점포 유리창부터 닦아주는 등 점주들과 친해지는 전략을 썼다.

묵묵히 가게일을 도와주는 직원들의 행동에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한 소매상인들은 하나 둘씩 크라운제과의 제품을 사주기 시작했다.

윤 회장은 이 방식을 그대로 서울로 가져와 적용하면서 전국 유통망을 소매상에게 직접 판매하는 방식으로 통일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기계 만지는 것을 좋아한 윤 회장은 그 꿈을 접지 못하고 1980년대 초 크라운제과를 떠나 인천에서 제과포장 기계를 생산하는 한국자동기계를 차려 독립하기도 했다.

기계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사회 초년병 시절부터 쭉 제과업계에만 있었던 탓에 기계공들을 부리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 공장에 있는 기계에 관한 책을 열 권은 넘게 읽었을 거예요.

그렇게 책을 파고 나니 기계에 눈을 뜨게 되고,직원들도 효율적으로 부릴 수 있게 됐죠."

인천공장 시절이 순탄치 만은 않았다.

"하도 어려워서 목매달 생각도 해 보고,한강 다리에도 몇 번 올라갔습니다.

한 때는 '나를 종으로 팔면 얼마나 받을까'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특유의 배포와 낙천적인 성격으로 15여년간 기계 공장을 운영해갔다.

이런 기계공장 사업도 1995년 선친의 부름으로 접게 됐다.

크라운으로 돌아온 지 3년이 조금 안 된 시점,윤 회장은 일생일대의 큰 위기를 맞게 된다.

IMF 위기가 터진 1998년 정월 초 회사가 단돈 2억원을 못 막아 최종 부도처리 된 것.그가 다시 회사로 돌아와서 단기 채무가 많은 것을 무시하고 대부분의 자금을 장기자금으로 돌려놓은 것이 화근이었다.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보험회사 등에서 채무 상환 날짜를 연장해 주지 않은 것이다.

윤 회장은 이 때의 일을 '미숙한 운전자 탓에 안개가 좀 꼈다고 가로수를 들이받은 일'이라고 회고한다.

사적 화의가 시작된 후에 보니 회사의 상황이 생각만큼 나쁘지 않아서였다.

사채업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협박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당당하게 대처했다.

"나를 살려서 받을 것인지,이 자리에서 죽이고 돈을 날릴 것인지 택하라고 도리어 윽박질렀죠.내가 도망갈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다들 조용해지더군요." 채권단에서도 그의 진실성을 믿어준 덕에 법정관리나 워크아웃보다 조건이 훨씬 나은 사적 화의를 통한 회생을 도모할 수 있었다.

간신히 한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할 무렵,윤 회장은 또 한번 '사고'를 쳤다.

크라운제과 매출의 두 배가 넘는 해태를 인수하려고 한 것.그의 무모함에 대부분의 직원들은 반대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예전에야 큰 회사가 작은 회사를 먹었지만 지금은 빠른 회사가 느린 회사를 먹는 시대라며 직원들을 설득했죠.사실 이제 회사의 크기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는 인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군인공제회를 찾아갔다.

당시 해태제과는 외국계 기업 서너 곳에서 대부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었다.

윤 회장은 해태제과는 오랜 역사의 '민족 기업'인 만큼 외국인 손에 맡기기보다는 자신이 되찾아오고 싶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런 다음 대한제분 등 크라운제과의 협력회사들한테 십시일반으로 도와달라고 '사정 반 압력 반'으로 부탁했다.

마침내 여기에 회사채 발행과 군인공제회 등의 자금을 지원받아 최종 낙찰가 5000억원에 해태제과를 사게 됐다.

처음에는 노사 간의 갈등,크라운과 해태 직원 간의 융화 문제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윤 회장 특유의 자신감과 여러 아이디어로 쌓인 문제점들을 차근차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윤 회장의 가장 큰 꿈은 과자를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고객들에게 꿈을 선사하는 매개체로 만드는 것.그는 마치 영화 '찰리와 초콜릿공장'에서 초콜릿공장이 단순히 과자를 만들어 내는 곳이 아니라 아이들이 동경하는 환상의 세계인 것과 같은 즐거움을 주고싶다고 한다.

이런 윤 회장의 생각은 생활 곳곳에서 드러난다.

대표적인 예가 현재 안양 신사옥 앞에 만들고 있는 구름다리다.

다리가 네 개인데 맨 오른쪽 것은 누구나 쉽게 건널 수 있도록 설계했고,왼쪽으로 갈수록 난이도를 어렵게 만들었다.

"처음엔 누구나 오른쪽에 있는 쉬운 다리를 가지만 누군가 한두 단계 어려운 다리에 도전하기 시작하면 결국 나중엔 모든 사람이 맨 왼쪽에서 도전을 즐기고 있게 됩니다." 직원들이 회사 곳곳에서 '도전(challenge)'과 '재미(fun)'를 느끼다 보면 과자 안에도 그와 같은 콘텐츠를 담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윤 회장은 앞으로 차근차근 크라운·해태제과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크라운제과가 해태제과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은 '빨랐던' 덕이지만,앞으로는 문화가 높은 기업이 낮은 기업을 인수하는 시대가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미와 도전을 회사 안에서 추구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회사의 문화를 어떻게 정착시키느냐에 앞으로의 사활이 달렸다고 봅니다."

박신영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