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연해주 지역 자루비노 항구에서 8시간을 넘게 달려한 빠르티잔스크,그 곳은 문명의 혜택을 받은 내게 조국에 대한 고마움과 소중한 민족의 힘을 배우게 해주었다.

속초항에서 대한민국 청소년봉사단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나는 막연히 "봉사하러 간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빠르티잔스크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의 삶과 애환을 직접 보고 들으면서 우리 청소년들이 봉사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새삼 깨닫고 봉사기간 내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였다.

빠르티잔스크는 "빨치산스크"라는 고려인 말이 러시아 말로 발음되면서 붙은 지명이라고 한다. 일제 강압기에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온 독립운동가들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피 눈물을 흘리며 싸우던 성지임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한인 전체가 중앙아시아로 쫓겨나면서 고려인들의 삶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한다. 근대사의 격량기에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한 고려인들은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하루종일 갈대밭을 개간해야 했으며,풍토병과 굶주림으로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고려인들에게 중앙아시아는 '눈물'의 땅이었고,'땅의 힘'만 믿으며 가정을 일구고 후대를 지켜야 하는 고난의 정착지였다.

그렇게 역경을 겪던 고려인들은 1991년 구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의 민족주의 정책 때문에 다시 연해주로 이주 정착하고 있다.

러시아는 1993년 4월 고려인 강제이주를 사죄하면서 숙청한 고려인 지식인들의 명예회복을 결의하고 원거주지로의 귀환과 민족문화 재생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은 잠깐뿐이었다. 또 한국으로부터의 거대한 투자나 연해주 개발방안도 기대에 못 미쳐 한인들의 어려운 삶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빠르티잔스크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제일 가슴 아팠던 것은 열악한 주거환경과 경제사정도 있지만 고려인 2,3세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도태되고 있는 현실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젊은이들이 삶의 기회를 뺏기고 있다는 생각에 많이 속상했다.

시꼴라 29번 학교에서 도배와 장판,벽화그리기,민속문화 체험관 건축 등 주거환경 개선 활동을 할 때 우리를 보고 기뻐하던 아이들…,봉사활동을 마치고 헤어질 때 슬픈 눈망울을 반짝이며 아쉬워하던 어린 샤사, 레딘,안드레아 박,일리아나…. 이민족의 설움을 겪고 있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오직 동포애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이면 고려인들이 연해주로 강제 이주된 지 70주년이라고 한다.

지금도 나이 많은 고려인 동포를 위로하며 1~3세들의 비극적 민족사의 대물림을 막으려 노력하고 있지만,흩어진 동포를 돕는 일은 우리뿐임을 알고 적극적인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통일은 남과 북의 물리적 통합도 중요하지만 해외 거주 한민족을 민족공동체 관점에서 하나로 묶는 일도 더 없이 중요하다고 본다.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청소년들이 한번쯤 해외 거주 한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더 큰 시각으로 조국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새봄 생글기자(군포 수리고 2년) saebomj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