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신문 9월27일자 A10면

이용훈 대법원장은 26일 '검찰·변호사 비하성 발언 파문'과 관련,"구술주의와 공판중심주의 원칙을 강조하다 보니 말 실수를 하게 됐다"고 해명했다. 이 대법원장은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재판 방향,국민과의 관계,원칙에 대해서는 조금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 대법원장의 해명을 검찰과 변호사협회가 일단 수용키로 함에 따라 법조계 파문도 진정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대법원장이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사법개혁의 핵심인 공판중심주의 등을 둘러싸고 검찰·변협과 마찰을 빚을 소지가 있어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다.

김현예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기자 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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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대법원장의 '검찰·변호사 비하 발언'으로 촉발된 법원·검찰·변호사단체 등 이른바 '법조 3륜(輪)'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대법원장의 유감 표명으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이들 간 갈등의 골이 깊어졌음은 물론 언제 또다시 불협화음이 재연될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실제로 검찰이 공판중심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증거분리제출제도(수사기록 중 공소사실 입증에 필요한 부분만 발췌해 증거로 제출하는 것)의 확대 시행 방침을 밝히는가 하면,현직 변호사가 대법원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하고 민사소송도 제기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사실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법조계에 대한 불신이 크다.

사정이 이런데도 어느 집단보다 법과 이성으로 행동해야 할 법조계가 감정 싸움과 주도권 다툼으로 빠져든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대법원장의 발언이 사법개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과연 사법부 수장으로서의 품격과 권위에 맞는지도 의문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 집단인 법조계가,그것도 글로벌 시대를 맞아 한번쯤 치러야 할 홍역으로 통하는 '공판중심주의' 도입을 둘러싸고 이전투구식 다툼을 벌였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대법원장의 '공판중심주의' 발언이 파문의 발단

이번 파문은 대법원장이 전국 법원을 순시하면서 쏟아낸 발언들이 발단이 됐다.

"밀실수사로 만들어진 검찰 수사기록을 던져버리라"거나 "변호사들이 만든 서류는 대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말로 장난치는 것이 대부분이다","사법의 중추는 법원이고 검찰과 변호사 단체는 보조 기관이다"라는 발언은 '공판중심주의'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법조계에 파문을 몰고온 공판중심주의나 구술주의는 검찰 조서와 변호사 의견서에 의존하지 말고 법정에서 증인 진술과 피고인 심문을 토대로 진실을 밝힌 뒤 이를 근거로 유·무죄를 가리고 형량을 정하는 것이다.

이 제도가 정착되면 검찰과 변호사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질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공판중심주의는 판사와 검사가 서면과 기록에 의존해 서로 편하게 지내왔던 관행과 전관예우 풍토를 없앨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인 2004년에도 검사의 조서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위한 요건을 엄격히 제한하는 대법원 판례 변경을 이끌어 냈을 만큼 공판중심주의에 남다른 소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쪽,"공판중심주의 재판은 진실 발견에 역행"

이에 대한 검찰쪽 반발도 만만치 않다.

공판중심주의 재판이 피고인의 방어권을 보장한다는 장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 발견에는 역행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공판중심주의 재판이 조서재판에 비해 개선된 것이기는 하지만 증언과 자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조직폭력이나 성범죄,뇌물수수 사건 등에서는 국가의 범죄소추 기능이 약화되고 사정 기능이 마비돼 법질서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재판 과정에서 수집된 증거만을 사실로 인정하면 언어구사력이 뛰어난 변호사를 선임하는 재력가들은 법망을 피해갈 수도 있어 '유전무죄 무전유죄' 관행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검찰 수사의 손발을 다 묶어 놓고 피고인 권리만 강조해서는 실체적 진실 접근과 피해자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수사기관에서의 허위진술죄와 법정에서의 위증죄를 동시에 법 조항으로 규정해 진실을 말해야 할 의무를 국민에게 지우고,검찰이 피고인에게 증거서류를 미리 보여주는 증거개시의 범위를 제한함으로써 공판중심주의 재판의 문제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조계 사법개혁을 위한 지혜 모아야

대법원장의 말에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기는 하지만 그 기본 취지에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검찰이 공권력을 휘두르고,변호사들 또한 비리를 저지르며 브로커를 이용해 판결을 이끌어 내고 있는 실정에 비춰보면 조서와 영장에 의존하는 기존의 수사관행을 언제까지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법원 검찰 모두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무턱대고 공판중심주의 도입을 서두르는 것이 능사가 아님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검찰과 변호사에 대한 지적이 개혁의 시작이 될 수는 있어도 전부가 돼서는 결코 안 될 것임은 물론이다.

이제 법조 3륜은 갈등을 봉합하고 사법개혁 논쟁이 생산적 방향으로 흐를 수 있도록 물꼬를 터나가야 한다.

사법개혁을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한다는 얘기다.

김경식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 kimk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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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어풀이 ]


법조 3륜(三輪)=사법업무를 담당하는 판사와 검사,변호사 집단을 말하며 이들이 수레바퀴처럼 어우러져 굴러간다는 의미다.

법원쪽에서 서로 다른 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은 동료의식을 내세우는 표현이라며 비판하고 있다.

공판중심주의=공정한 재판을 위해 공개재판(공판)이 절차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구두주의와 직접주의가 포함된다.

구두주의란 모든 소송관계인들의 주장과 입증 및 반박은 원칙적으로 서류가 아닌 말로써 해야 한다는 것이며 직접주의란 재판관이 직접 조사한 증거만을 가지고 사실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선변호인 확대 등과 함께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핵심 개혁과제로,형사소송법 개정안에 반영돼 있다.

조서중심주의=검사가 기소하면서 제출한 진술조서와 변호사 의견서 등 수사자료를 바탕으로 판사가 판결을 내리는 것.말은 잘못 기록될 여지가 있지만 서면은 오해의 소지가 적다는 이유에서 도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