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 정규재 생글생글 편집인 >
→한국경제신문 9월19일자 A39면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은 적지않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넘치는 인문학과들과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들의 취업 위기를 곧바로 학문의 위기로 얼버무려 놓은 것이 우선 답답한 일이고 인문학의 위기를 시장원리와 효율성 추구 탓으로 매도하는 데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반시장 정서의 뿌리가 궁금하더니 인문학이 바로 그 허위의식의 산파역을 해왔다는 의문까지 갖게 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폄훼하고 노동하는 인간을 천시하며 선의의 경쟁을 거부하는 것을 인문학 육성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런 인문학은 보호받기 보다는 똑같은 언어로 폄훼되고 천시되며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인문학 선언에 이은 강연에서 한 철학과 교수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총장 선거에 출마하며 학문의 전당을 아예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개탄했다고 하니 이 대목은 부디 그 한 분의 오도된 감정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주의를 일컬어 시장판이라고 내갈기기로 따진다면 동서양 지성사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현대 자유주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하이에크며 칼 포퍼 같은 지극히 진지한 철학자들이 시장판의 호객꾼이라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문학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저잣거리를 벗어나 고고한 지성의 언덕 위에서 과연 어떤 사상의 성채를 구축하고 있는지 우선 보여달라.
지동설 시대의 천동설 같은, 진화론 시대의 ‘낡은 창조론’ 같은 괴이한 논리를 어디서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거부하고 천시하는 것을 인문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박지원이며 정약용이며 거슬러 올라가 자유주의의 동양판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자와 장자는 사상사의 반열에서 아예 제외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자와 장자를 자유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신선술(神仙術)에 불과할 터인데 지금 우리더러 신선놀음을 하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같이 편향된 인문학이라면 차라리 시대착오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인문학 선언’의 문면(文面)의 논리 또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선언문은 “세계화의 급류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해소하고 평화적 공존과 문화적 다양성에 입각한 국제 사회의 건설…”이라고 쓰고 있다.
무언가 드러내놓고 말하고 싶은 부분을 애써 유보해놓은 이 음험한 선동적 표현의 함의를 분명히 밝혀 달라.
최근 수세기 동안 현실 세계를 규정해오고 있는 시장경제 사상을 인문적 가치라고는 일획도 모르는 장사치들의 현세철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한 애덤 스미스는 물론이고 근세의 저 위대한 철학자들조차 일거에 설자리를 잃고 말 터인데 이들을 제쳐두고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인지…. 전근대 스토아주의와 조선 주자학의 지엽 말단 혹은 반문명적 니힐리즘 따위를 소위 비판의식이라고 가르치고 싶은지 궁금하다.
도덕철학과 인성론 분야마저 분자 생물학의 도전을 받는 현실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라고 주장할 것인지 한국의 철학자들은 제대로 답해달라.
취업이 안되기로는 이공대생들도 마찬가지이고 대학교수 후보들의 일자리가 없기로는 대학 공급 과잉의 시대에 도처에 만연한 현상이다.
고교 졸업생의 83%가 진학하는 나라에서 사농공상 시대의 선비계급적 이상을 인문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인문학과와 학생수는 더욱 줄여나가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선비보다는 상업 공업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런 사회가 더욱 건강할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고 필요 인구수보다 많은 인문계 학생들을 전국의 모든 대학에 비율대로 유치하고 재정지원 역시 그래야 한다면 이미 교수가 된 분들의 밥그릇을 키울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에겐 고달픈 실업자 코스를 더 넓힐 뿐이다.
철학을 일컬어 ‘자식들(다른 학문 분야)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늙은 어머니 같은 처지’라고 했다지만 인문학의 위기를 스스로가 아닌 바깥 세계의 잘못으로 돌린다면 이는 차라리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jkj@hankyung.com
< 인문학 위기는 스스로 초래한건 아닌지 … >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으로 촉발된 인문학 위기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26일에는 전국 80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이 성명서를 발표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정신적인 수준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신입생 감소, 교양과목 축소, 졸업생 취업난, 정부 지원부족 등으로 인문학이 고사 위기라고 주장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문학 내부에 잠재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류 학계의 배타성, 대중과 괴리된 채 상아탑에 안주하는 성향, 해외이론 따라가기에 급급하거나 이미 유행이 지난 낡은 사상에 함몰, 재탕·삼탕식 논문쓰기 등에 대해 스스로 반성부터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다 지성과 교양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정치판의 댓글정치,막말정치도 한몫했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생글생글 편집인)은 이 다산칼럼에서 인문학이 처한 현실은 '위기'가 아니라 '빈곤'이라고 질타한다.
특히 철학자로 출발한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시장경제 사상을 장사치들의 현세철학으로 깎아내리는 식이라면 지식의 빈곤이요, 인문학의 위기를 스스로가 아닌 바깥 세계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는다.
실사구시,노동,경쟁 등의 가치를 외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 여긴다면 실학자들의 대척점에 섰던 시대착오적 유학자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현재 인터넷과 휴대폰의 급속한 확산을 토대로 한 콘텐츠의 무한확장이 진행되고 있다.
초고속 시대에 '고루한' 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게 요즘 세태이다.
더욱이 인문학계에선 대학교재 외엔 팔리는 책이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미국 일본 유럽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인문학자가 쓴 책들이 수시로 오른다.
이런 책들은 국내에 번역되어도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내에선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인문학자들이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을 한 차원 높게 이끌어갈 제대로 된 저작이나 결과물을 내놓았는지 되묻고 싶다.
인문학 못지않게 곤궁한 세월을 보낸 국내 문화계는 시대변화를 읽고 시대논리에 맞춰 문화를 고부가산업으로 격상시켜 나아갈 길을 찾았다.
'난타'나 '명성왕후'가 이를 입증한다.
이 시대의 인문학자들이 '선언'에 앞서 정작 무엇을 해야할지 시사한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
→한국경제신문 9월19일자 A39면
고려대학교 문과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은 적지않은 당혹감으로 다가온다.
넘치는 인문학과들과 쏟아져 나오는 졸업생들의 취업 위기를 곧바로 학문의 위기로 얼버무려 놓은 것이 우선 답답한 일이고 인문학의 위기를 시장원리와 효율성 추구 탓으로 매도하는 데는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반시장 정서의 뿌리가 궁금하더니 인문학이 바로 그 허위의식의 산파역을 해왔다는 의문까지 갖게 된다.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폄훼하고 노동하는 인간을 천시하며 선의의 경쟁을 거부하는 것을 인문학 육성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그런 인문학은 보호받기 보다는 똑같은 언어로 폄훼되고 천시되며 거부되어야 마땅하다.
인문학 선언에 이은 강연에서 한 철학과 교수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 총장 선거에 출마하며 학문의 전당을 아예 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개탄했다고 하니 이 대목은 부디 그 한 분의 오도된 감정이기를 바랄 뿐이다.
자유주의를 일컬어 시장판이라고 내갈기기로 따진다면 동서양 지성사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현대 자유주의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하이에크며 칼 포퍼 같은 지극히 진지한 철학자들이 시장판의 호객꾼이라도 된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그렇다면 한국의 인문학은 복잡하고 혼란스런 저잣거리를 벗어나 고고한 지성의 언덕 위에서 과연 어떤 사상의 성채를 구축하고 있는지 우선 보여달라.
지동설 시대의 천동설 같은, 진화론 시대의 ‘낡은 창조론’ 같은 괴이한 논리를 어디서 들고 나왔는지 모르겠다.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거부하고 천시하는 것을 인문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박지원이며 정약용이며 거슬러 올라가 자유주의의 동양판 원조라고 할 수 있는 노자와 장자는 사상사의 반열에서 아예 제외해야 한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노자와 장자를 자유주의가 아니라고 한다면 남는 것은 신선술(神仙術)에 불과할 터인데 지금 우리더러 신선놀음을 하자는 것은 아닐 터이다.
그같이 편향된 인문학이라면 차라리 시대착오라는 말을 들어 마땅하다.
‘인문학 선언’의 문면(文面)의 논리 또한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선언문은 “세계화의 급류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충돌을 해소하고 평화적 공존과 문화적 다양성에 입각한 국제 사회의 건설…”이라고 쓰고 있다.
무언가 드러내놓고 말하고 싶은 부분을 애써 유보해놓은 이 음험한 선동적 표현의 함의를 분명히 밝혀 달라.
최근 수세기 동안 현실 세계를 규정해오고 있는 시장경제 사상을 인문적 가치라고는 일획도 모르는 장사치들의 현세철학이라고 주장한다면 도덕감정론에서 출발한 애덤 스미스는 물론이고 근세의 저 위대한 철학자들조차 일거에 설자리를 잃고 말 터인데 이들을 제쳐두고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인지…. 전근대 스토아주의와 조선 주자학의 지엽 말단 혹은 반문명적 니힐리즘 따위를 소위 비판의식이라고 가르치고 싶은지 궁금하다.
도덕철학과 인성론 분야마저 분자 생물학의 도전을 받는 현실 속에서 과연 무엇이 진정한 인문학의 위기라고 주장할 것인지 한국의 철학자들은 제대로 답해달라.
취업이 안되기로는 이공대생들도 마찬가지이고 대학교수 후보들의 일자리가 없기로는 대학 공급 과잉의 시대에 도처에 만연한 현상이다.
고교 졸업생의 83%가 진학하는 나라에서 사농공상 시대의 선비계급적 이상을 인문학적이라고 주장한다면 인문학과와 학생수는 더욱 줄여나가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선비보다는 상업 공업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또 그런 사회가 더욱 건강할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대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놓았다고 필요 인구수보다 많은 인문계 학생들을 전국의 모든 대학에 비율대로 유치하고 재정지원 역시 그래야 한다면 이미 교수가 된 분들의 밥그릇을 키울지는 모르지만 학생들에겐 고달픈 실업자 코스를 더 넓힐 뿐이다.
철학을 일컬어 ‘자식들(다른 학문 분야)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준 늙은 어머니 같은 처지’라고 했다지만 인문학의 위기를 스스로가 아닌 바깥 세계의 잘못으로 돌린다면 이는 차라리 상상력의 빈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jkj@hankyung.com
< 인문학 위기는 스스로 초래한건 아닌지 … >
고려대 교수들의 '인문학 선언'으로 촉발된 인문학 위기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26일에는 전국 80개 대학 인문대학장들이 성명서를 발표한다.
인문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학문이면서 동시에 그 나라의 정신적인 수준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신입생 감소, 교양과목 축소, 졸업생 취업난, 정부 지원부족 등으로 인문학이 고사 위기라고 주장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
인문학의 위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인문학 내부에 잠재해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류 학계의 배타성, 대중과 괴리된 채 상아탑에 안주하는 성향, 해외이론 따라가기에 급급하거나 이미 유행이 지난 낡은 사상에 함몰, 재탕·삼탕식 논문쓰기 등에 대해 스스로 반성부터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여기에다 지성과 교양을 한없이 깎아내리는 정치판의 댓글정치,막말정치도 한몫했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생글생글 편집인)은 이 다산칼럼에서 인문학이 처한 현실은 '위기'가 아니라 '빈곤'이라고 질타한다.
특히 철학자로 출발한 애덤 스미스가 주창한 시장경제 사상을 장사치들의 현세철학으로 깎아내리는 식이라면 지식의 빈곤이요, 인문학의 위기를 스스로가 아닌 바깥 세계의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상상력의 빈곤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는다.
실사구시,노동,경쟁 등의 가치를 외면하는 것이 인문학이라 여긴다면 실학자들의 대척점에 섰던 시대착오적 유학자들과 별로 다를 게 없어진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현재 인터넷과 휴대폰의 급속한 확산을 토대로 한 콘텐츠의 무한확장이 진행되고 있다.
초고속 시대에 '고루한' 책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게 요즘 세태이다.
더욱이 인문학계에선 대학교재 외엔 팔리는 책이 없다고 한탄한다.
하지만 미국 일본 유럽의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인문학자가 쓴 책들이 수시로 오른다.
이런 책들은 국내에 번역되어도 독자들이 외면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내에선 대학에 몸담고 있는 인문학자들이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을 한 차원 높게 이끌어갈 제대로 된 저작이나 결과물을 내놓았는지 되묻고 싶다.
인문학 못지않게 곤궁한 세월을 보낸 국내 문화계는 시대변화를 읽고 시대논리에 맞춰 문화를 고부가산업으로 격상시켜 나아갈 길을 찾았다.
'난타'나 '명성왕후'가 이를 입증한다.
이 시대의 인문학자들이 '선언'에 앞서 정작 무엇을 해야할지 시사한다.
오형규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