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8월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금태환정지를 선언한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은 브레튼 우즈체제를 재건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썼다.
당시만 해도 안정적인 국제통화시스템이 세계경제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개월여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내 12월18일 선진 10개국 재무장관들은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스미소니언 협정은 브레튼 우즈체제의 기본을 유지하되 미국의 무역적자를 감안하여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되 달러화의 가치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평가절하하고,환율의 변동폭을 상하 1%에서 2.25%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변동폭이 확대됨으로써 환율의 불안이 가시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1972년 스위스 바젤에 모여 협정을 맺고 이른바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를 채택했다.
스네이크 체제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 달러화에 대해 상하 2.25%의 변동폭을 유지하되,역내 국가들 사이의 환율은 상하 1% 범위 내에서 변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달러화에 대한 변동폭을 터널로,유럽 내 국가들 사이의 변동폭을 그 안에 들어 있는 뱀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같은 선진국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경제 흐름은 더 이상 고정환율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가 간 자본이동이 활발한 가운데 고정환율을 유지하면서도 국내 경기의 진작을 위한 통화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경기 회복을 위해 정부에서 통화팽창 정책을 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통화공급을 증대시키면 한편에서 물가가 상승할 것이고,다른 한편에서는 자금시장에 돈이 풍부해지므로 이자율이 하락한다.
물가상승은 무역수지 악화를 초래하게 되고 이는 자국통화의 유출이 많아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자율이 하락하는 것 역시 더 높은 이자를 위해 자본이 빠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자본유출이 발생하면 통화의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미국 정부당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 외국돈을 파는 정책을 써야 한다.
이렇게 되면 유통되는 달러의 양이 줄어들게 되고,애초에 의도했던 통화팽창 정책의 효과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의 이동성,자율적인 통화정책,고정환율의 유지라는 세 가지 경제 현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불가능한 트리오인 것이다.(차명수,'금융공황과 외환위기,1870~2000')
1970년대 초의 상황을 살펴보면 국제 자본이동은 도도한 경제사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생명이 걸려 있다고 할 수 있는 통화팽창 정책과 같은 경기진작책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셋 중에 반드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정환율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이 먼저 1972년 6월 변동환율을 선언했고 프랑스,이탈리아 등이 뒤이어 이중환율제를 채택했다.
투기자본이 마르크화와 엔화에 집중되면서 달러가치는 하락했고,마침내 미국은 1973년 2월 금 1온스당 38달러에서 42.22달러로 다시 한번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그러자 유럽의 국가들은 달러화에 대한 공동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브레튼 우즈체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후 세계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브레튼 우즈체제는 국제경제의 파란만장한 변화를 몰고온 변동환율제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
당시만 해도 안정적인 국제통화시스템이 세계경제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4개월여에 걸친 협상 끝에 마침내 12월18일 선진 10개국 재무장관들은 미국의 워싱턴에 있는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모여 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스미소니언 협정은 브레튼 우즈체제의 기본을 유지하되 미국의 무역적자를 감안하여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즉 조정가능한 고정환율제를 유지하되 달러화의 가치를 금 1온스당 35달러에서 38달러로 평가절하하고,환율의 변동폭을 상하 1%에서 2.25%로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유럽의 선진국들은 변동폭이 확대됨으로써 환율의 불안이 가시화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1972년 스위스 바젤에 모여 협정을 맺고 이른바 스네이크 체제(snake in the tunnel)를 채택했다.
스네이크 체제는 유럽 국가들이 미국 달러화에 대해 상하 2.25%의 변동폭을 유지하되,역내 국가들 사이의 환율은 상하 1% 범위 내에서 변동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달러화에 대한 변동폭을 터널로,유럽 내 국가들 사이의 변동폭을 그 안에 들어 있는 뱀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 같은 선진국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경제 흐름은 더 이상 고정환율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가 간 자본이동이 활발한 가운데 고정환율을 유지하면서도 국내 경기의 진작을 위한 통화정책이 효과를 거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내 경기 회복을 위해 정부에서 통화팽창 정책을 쓰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통화공급을 증대시키면 한편에서 물가가 상승할 것이고,다른 한편에서는 자금시장에 돈이 풍부해지므로 이자율이 하락한다.
물가상승은 무역수지 악화를 초래하게 되고 이는 자국통화의 유출이 많아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자율이 하락하는 것 역시 더 높은 이자를 위해 자본이 빠져나가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렇게 자본유출이 발생하면 통화의 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환율을 일정 수준에서 고정시키기 위해서는 외환시장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 이러한 상황이 발생했다면 미국 정부당국은 달러화의 가치를 끌어올리기 위해 외환시장에서 달러를 사고 외국돈을 파는 정책을 써야 한다.
이렇게 되면 유통되는 달러의 양이 줄어들게 되고,애초에 의도했던 통화팽창 정책의 효과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자본의 이동성,자율적인 통화정책,고정환율의 유지라는 세 가지 경제 현상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른바 불가능한 트리오인 것이다.(차명수,'금융공황과 외환위기,1870~2000')
1970년대 초의 상황을 살펴보면 국제 자본이동은 도도한 경제사적 흐름이었기 때문에 이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정치적 생명이 걸려 있다고 할 수 있는 통화팽창 정책과 같은 경기진작책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셋 중에 반드시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고정환율제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국이 먼저 1972년 6월 변동환율을 선언했고 프랑스,이탈리아 등이 뒤이어 이중환율제를 채택했다.
투기자본이 마르크화와 엔화에 집중되면서 달러가치는 하락했고,마침내 미국은 1973년 2월 금 1온스당 38달러에서 42.22달러로 다시 한번 평가절하를 단행했다.
그러자 유럽의 국가들은 달러화에 대한 공동 변동환율제로 이행했고,브레튼 우즈체제는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전후 세계경제의 회복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브레튼 우즈체제는 국제경제의 파란만장한 변화를 몰고온 변동환율제에 자리를 내주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