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환본위제는 트리핀 딜레마로 알려진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국제경제의 성장과 더불어 기축통화에 대한 요구는 늘어나는데 이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달러화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달러화가 국제시장으로 흘러나가기 위해서는 수출보다 수입이 많아 미국이 무역적자를 보이거나,미국으로부터 자본 유출이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미국 경제에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미국은 몇 가지 임시방편책을 강구했다.

우선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방지해야 했다.

1950년대 말 미국의 무역적자가 상당한 규모에 이르게 되자 달러화를 외환으로 보유하고 있던 많은 나라에서 금을 선호하는 경향이 생겼다.

더구나 달러화 가치가 앞으로 더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을 보유하고자 하는 환투기적 성격의 금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금가격이 크게 오르게 되었고,1960년부터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선진국들은 공동으로 금시장에 개입해 금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금풀(gold pool)의 탄생이었다.

두 번째로는 국제시장에서 부족한 유동성(경제·무역 규모는 커지는데 기축통화인 달러의 공급이 부족한 상황)을 보완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대출기능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IMF는 참여국들이 돈을 내 만든 기금으로 이를 필요한 회원국이 빌려쓰도록 되어 있었다.

바로 이 각국의 출연금을 늘림으로써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1959년에 출연금을 50%,66년에 25%를 각각 늘렸다.

세 번째 조치로는 미국으로부터의 자본 유출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이자율을 높이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미국 정부는 장기국채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기국채의 이자율을 높이는 조치를 취했고,이와 함께 1963년에는 미국인이 외국의 금융자산에 투자할 경우 세금을 부과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965년에는 외국의 투자가들이 미국의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빌리는 경우에도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임시방편적인 조치들로는 트리핀 딜레마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69년 마침내 탄생한 것이 IMF의 특별인출권(SDR)이다.

SDR는 IMF에 출연한 기금만큼 IMF로부터 돈을 인출할 수 있는 권리로 그 자체를 하나의 통화로 인정한 것이다.

SDR의 가치는 달러화와 같은 금 1온스당 35SDR로 정해졌다.

1970년 1월1일부터 3년간 발행될 SDR는 95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1970년에야 시작된 SDR는 시기적으로 너무 늦은 결정이었다.

1967년 이미 영국은 파운드화의 평가절하를 단행했고,프랑스는 1965년과 66년 대규모로 보유달러를 금으로 바꾸었을 뿐 아니라 67년에는 금풀에서 빠졌다.

1968년 3월 영국이 일시적으로 금시장의 거래를 중지시키면서 금풀은 폐기되었다.

이로 인해 달러를 비롯한 주요국들의 환율은 불안정한 양상을 보였고,미국의 무역적자가 더 커지면서 달러화에 대한 불안은 가중되었다.

미국이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미국 은행으로부터의 차입금에 대해 과세한 것도 런던의 유럽통화시장을 키워주는 결과를 초래했고,이는 다시 미국 금융시장의 지위를 약화시킴으로써 달러화의 위상에 결정타를 가했다.

당시 서독은 1971년 더 이상 달러화에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시키기를 거부했고,독일 마르크화는 달러화에 대해 큰 폭의 가치상승이 이뤄졌다.

금가격은 온스당 44달러에 달했다.

1971년 8월15일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달러화의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그리고 IMF가 새로운 국제통화시스템의 창출을 위한 제안을 하도록 요청했다.

이로써 미국의 경제적 이해를 위해 유지돼 왔던 금환본위제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브레튼 우즈체제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후 미국은 변형된 형태로 브레튼 우즈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1973년 완전자유변동환율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노택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