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운 (주)효성 사장(54)은 천부적인 장사꾼이다.
젊은 시절 그는 커다란 이민가방에 샘플들을 쑤셔넣고 겁없이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효성의 새파란 신입사원에게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집에까지 찾아왔던 얘기는 지금도 섬유업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섬유수출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며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라선 그이지만 학창시절의 꿈은 기업인이 아니라 대학교수였다.
경기고(66회·1970년 졸업)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뒤 1976년 11월 효성물산에 입사한 것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잠깐 사회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연찮게 학교에 들러 효성물산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그해 9월 말 교수 추천을 통해 입사한 것.
"처음엔 효성물산이 종합상사인 줄도,동양나이론이란 제품을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저 전공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처음 맡은 일은 직물(원사)수출.연구소를 지망했지만 회사는 그를 영업부에 배치했다.
화섬 면방 면직물을 취급하며 신용장 개설과 같은 무역실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영업은 의외로 재미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신의 실적을 쳐다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제가 영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저 스스로도 너무 놀랐습니다."
처음엔 텔렉스나 편지를 통해 영업을 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아예 출장을 나갔다.
주로 중동지역이었다.
쿠웨이트의 '알부자'가 모여 있는 포목상들을 집중 공략했다.
영업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무더운 낮에는 포목점들이 영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업은 선이 굵은 스타일이었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 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이었다.
현지 시장 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이 사장의 물건을 받아 돈을 번 상인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현지 신뢰도 높아지자 효성물산 주가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신입사원이었지만 중소기업 사장들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기다려 서로 샘플을 보여주려고 아우성이었다.
젊은 나이에 우쭐한 기분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꿈인 미국 유학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영업하는 재미에 빠져 차일피일 유학을 미루다보니 어느 새 3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섬유공학보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결국 1979년 여름에 사표를 냈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원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자 회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영업담당 임원은 이 사장을 붙들기 위해 호주 시드니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평사원에겐 특별한 혜택이었다.
유학을 가느냐,마느냐의 기로에서 그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참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면 기업과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회사에 남으려니 꿈을 접어야 하고."
하지만 비즈니스는 현실에 있었고 학자의 길은 막연하고 먼 미래였다.
어려운 영업을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한 기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삼성전자를 다니고 있던 친형 이상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도 효성 잔류를 권유했다.
그는 시드니행을 결정했다.
되돌리기 어려운 인생 최대의 승부처였다.
4년간의 시드니 생활을 마치고 1983년 귀국했다.
직물수출 과장이라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로는 효성물산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 사장은 목표를 세웠다.
당시 연간 3000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 규모를 5년 내 1억달러로 늘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선 수출대행 비중을 대폭 낮춰 직수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이나 홍콩에 현지 딜러를 두고 효성 브랜드로 직접 영업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할 경우 섬유 쿼터와 나일론 쿼터도 과감하게 사들였다. 이 사장은 당초 목표보다 2년 앞당긴 1986년에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효성물산의 직물 수출은 당시 선경과 1,2위를 다툴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차장으로 조기 승진했다. 1988년엔 이탈리아 밀라노에 1인 지점장으로 나갔다.
이미 다른 종합상사들이 진출해 있었지만 이 사장은 그곳에서도 항상 1등이었다.
가족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나갔던 그는 효성 외의 다른 기업들 제품까지 갖다 파는 왕성한 영업력으로 1년에 3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1994년 임원이 되자 이 사장의 가슴 속에도 야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사장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기획실,시장개척실,사업개발실 등을 복수로 맡으며 나름대로 경영감각을 익혀 나갔다.
종합상사는 점점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확장일로의 영업은 방대한 해외 네트워크를 남겼지만 수익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1997년 IMF사태가 터지자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각됐다.
효성그룹은 효성T&C,효성생활산업,효성중공업,효성물산 등 4개사를 통합해 ㈜효성으로 출범했다.
동시에 이 사장에게 ㈜효성의 자금 업무를 맡겼다.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의욕이 생겼습니다.
은행을 방문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은행을 나오는 것으로 하루 해가 졌습니다."
그는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유동성 위기가 해소되자 1999년 1월 전무로 승진해 회장 비서실장이 됐다.
어느 새 사내 업무에 통달하게 됐다.
회의를 열면 시간 단위로 다른 얘기를 해야 할 정도로 취급 품목이 많았지만 현미경적인 관리를 통해 탄탄한 사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효성의 대표이사가 됐다(2002년).다양한 업종과 사업분야를 갖고 있는 회사를 이끌 수 있는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람은 이 사장밖에 없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었다.
"제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업에 남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직장생활은 여러 가지 애환도 많지만 자신의 성장과 조직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반문합니다.
혹시 성장을 포기하지는 않았느냐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젊은 시절 그는 커다란 이민가방에 샘플들을 쑤셔넣고 겁없이 중동의 포목점 거리를 누볐다.
중소기업 사장들이 효성의 새파란 신입사원에게 자신들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집에까지 찾아왔던 얘기는 지금도 섬유업계의 전설로 남아 있다.
'섬유수출의 귀재'로 이름을 날리며 최고경영자 자리에 올라선 그이지만 학창시절의 꿈은 기업인이 아니라 대학교수였다.
경기고(66회·1970년 졸업)와 서울대 섬유공학과를 나온 뒤 1976년 11월 효성물산에 입사한 것은 유학을 떠나기 전에 잠깐 사회경험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우연찮게 학교에 들러 효성물산 모집공고를 보게 됐고 그해 9월 말 교수 추천을 통해 입사한 것.
"처음엔 효성물산이 종합상사인 줄도,동양나이론이란 제품을 갖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그저 전공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만 했었지요."
처음 맡은 일은 직물(원사)수출.연구소를 지망했지만 회사는 그를 영업부에 배치했다.
화섬 면방 면직물을 취급하며 신용장 개설과 같은 무역실무를 본격적으로 익혔다. 영업은 의외로 재미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신의 실적을 쳐다보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제가 영업에 소질이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어요.
저 스스로도 너무 놀랐습니다."
처음엔 텔렉스나 편지를 통해 영업을 했지만 어느 정도 자신감이 생기자 아예 출장을 나갔다.
주로 중동지역이었다.
쿠웨이트의 '알부자'가 모여 있는 포목상들을 집중 공략했다.
영업시간은 주로 밤이었다.
무더운 낮에는 포목점들이 영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업은 선이 굵은 스타일이었다.
상대방이 돈을 벌어야 거래를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품질에 하자가 생기면 두말 없이 전량 수거했다.
샘플 선택도 공격적이었다.
현지 시장 분위기와 유행을 면밀히 관찰한 뒤 새로운 제품들을 과감하게 내보냈다.
이 사장의 물건을 받아 돈을 번 상인들이 늘어나고 그에 대한 현지 신뢰도 높아지자 효성물산 주가도 덩달아 올라갔다.
그는 여전히 신입사원이었지만 중소기업 사장들은 아침에 출근하는 그를 기다려 서로 샘플을 보여주려고 아우성이었다.
젊은 나이에 우쭐한 기분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꿈인 미국 유학을 잊지 않고 있었다.
영업하는 재미에 빠져 차일피일 유학을 미루다보니 어느 새 3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섬유공학보다 경영학을 공부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한 정도였다.
결국 1979년 여름에 사표를 냈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원이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자 회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영업담당 임원은 이 사장을 붙들기 위해 호주 시드니 주재원으로 나갈 것을 제안했다.
평사원에겐 특별한 혜택이었다.
유학을 가느냐,마느냐의 기로에서 그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참 어려운 순간이었습니다.
유학을 가면 기업과는 영원히 멀어질 것 같았고 그렇다고 회사에 남으려니 꿈을 접어야 하고."
하지만 비즈니스는 현실에 있었고 학자의 길은 막연하고 먼 미래였다.
어려운 영업을 성공시켰을 때의 짜릿한 기분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시 삼성전자를 다니고 있던 친형 이상완 삼성전자 LCD총괄 사장도 효성 잔류를 권유했다.
그는 시드니행을 결정했다.
되돌리기 어려운 인생 최대의 승부처였다.
4년간의 시드니 생활을 마치고 1983년 귀국했다.
직물수출 과장이라는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로는 효성물산 최고의 요직이었다.
이 사장은 목표를 세웠다.
당시 연간 3000만달러에 불과하던 수출 규모를 5년 내 1억달러로 늘리겠다고 마음 먹었다. 우선 수출대행 비중을 대폭 낮춰 직수출체제로 전환했다.
미국이나 홍콩에 현지 딜러를 두고 효성 브랜드로 직접 영업하는 방식이었다.
필요할 경우 섬유 쿼터와 나일론 쿼터도 과감하게 사들였다. 이 사장은 당초 목표보다 2년 앞당긴 1986년에 1억달러 수출을 달성했다.
효성물산의 직물 수출은 당시 선경과 1,2위를 다툴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1986년 차장으로 조기 승진했다. 1988년엔 이탈리아 밀라노에 1인 지점장으로 나갔다.
이미 다른 종합상사들이 진출해 있었지만 이 사장은 그곳에서도 항상 1등이었다.
가족도 대동하지 않고 혼자 나갔던 그는 효성 외의 다른 기업들 제품까지 갖다 파는 왕성한 영업력으로 1년에 3000만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1994년 임원이 되자 이 사장의 가슴 속에도 야망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사장이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기획실,시장개척실,사업개발실 등을 복수로 맡으며 나름대로 경영감각을 익혀 나갔다.
종합상사는 점점 어려운 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확장일로의 영업은 방대한 해외 네트워크를 남겼지만 수익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1997년 IMF사태가 터지자 생존 자체가 절체절명의 과제로 부각됐다.
효성그룹은 효성T&C,효성생활산업,효성중공업,효성물산 등 4개사를 통합해 ㈜효성으로 출범했다.
동시에 이 사장에게 ㈜효성의 자금 업무를 맡겼다.
"아무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새로운 도전의욕이 생겼습니다.
은행을 방문하는 것으로 해가 뜨고 은행을 나오는 것으로 하루 해가 졌습니다."
그는 구원투수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유동성 위기가 해소되자 1999년 1월 전무로 승진해 회장 비서실장이 됐다.
어느 새 사내 업무에 통달하게 됐다.
회의를 열면 시간 단위로 다른 얘기를 해야 할 정도로 취급 품목이 많았지만 현미경적인 관리를 통해 탄탄한 사업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효성의 대표이사가 됐다(2002년).다양한 업종과 사업분야를 갖고 있는 회사를 이끌 수 있는 경험과 재능을 가진 사람은 이 사장밖에 없다는 것이 그룹의 판단이었다.
"제가 사장이 됐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라 기업에 남길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직장생활은 여러 가지 애환도 많지만 자신의 성장과 조직발전을 동시에 이룰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거든요.
저는 지금도 스스로에게 반문합니다.
혹시 성장을 포기하지는 않았느냐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