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으로부터 회복을 추구하던 세계경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을 맞게 된다. 이에 따라 대공황 이후 국제통화시스템의 복원을 추진하려던 노력 역시 물거품이 돼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전쟁 이후의 국제통화시스템에 대한 복원논의가 시작되었다. 미국과 영국은 전간기(inter-war period)에 있었던 대공황이 경쟁적 관세인상을 통해 자유무역주의가 훼손되고,경쟁적 평가절하를 통해 고전적 금본위시대의 안정적 국제통화시스템이 복원되지 못했던 데 원인이 있었다고 보고 이를 해결하는 데 중점을 두고자 했다.

영국에서는 대공황의 회복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 유명해진 케인스가 국제청산연맹 형태의 통화시스템을 제시했고,미국에서는 화이트가 국제안정화기금을 설립하는 내용으로 국제통화시스템의 복원을 꾀하는 제안을 했다. 케인스플랜과 화이트플랜으로 알려진 이들 제안은 국제협력을 통해 전후 세계경제체제의 구축을 추진하고자 했다는 점에서는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구체적인 방안에서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케인스플랜은 1930년대 영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국내 정책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면서 국제협력을 골자로 했다. 그러나 양차대전을 통해 국제경제에서 확고한 헤게모니로 등장한 미국은 국내정책보다는 국제협력에 초점을 두고자 했다.

케인스는 방코(bancor)라는 국제통화를 창출해 여기에 각국이 통화가치를 고정시키는 변형된 금본위제를 제안했고,화이트는 국제통화바스켓에 금의 가치를 연결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안정적 통화운영을 위해 국제기금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오랜 협상 끝에 마침내 화이트플랜이 받아들여져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 우즈에서 44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국제통화기금(IMF)의 창설에 합의했다. 이른바 브레튼 우즈체제가 출범한 것이다.

국제통화체제로서의 브레튼 우즈체제의 핵심은 환율제도에 있었다. 기본적으로 안정적 통화체제의 운영을 위해 고정환율제를 도입하되,1920년대 무리하게 금본위제의 부활을 추진했다가 실패한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일정한 범위 내에서 조정할 수 있는 환율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정가능한 페그'(adjustable peg)다. (여기서 페그시스템은 고정환율제의 가장 경직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보통 고정환율제는 환율이 변동할 수는 있지만 정부가 정해 놓은 수준을 벗어날 경우 외환시장에 개입해서 이를 되돌려 놓는 제도를 말하는데,페그제는 환율 수준 자체를 일정 수준에 법령 등으로 고정시키는 것이다. 텐트칠 때 박는 페그를 생각하면 쉽다.)

'조정가능한 페그제'에서 각국은 기본적으로 금의 가치에 자국통화의 가치를 연결시키도록 하고,이와 함께 금 태환이 가능한 다른 나라의 통화에도 자국통화의 가치를 고정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영국의 파운드나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인정해 간접적인 금 태환을 허용한 것이다. 환율은 상하 1% 범위 내에서 변동할 수 있도록 했다. 이것이 페그제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국제수지의 근본적인 불균형이 발생할 경우 환율을 조정할 필요가 생긴다. 무역적자가 발생해 상당 기간 지속된다면 자국통화의 가치를 떨어뜨려 수지개선을 꾀해야 한다. 이럴 경우 정해진 환율의 상하 10% 범위 내에서 환율조정을 IMF에 신청할 수 있도록 했고,조정을 요청하면 IMF에서는 실사를 거쳐 승인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것이 '조정 가능한'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조정 가능한 페그제'는 그러나 근본적인 불균형이라는 기준의 해석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되었다. 근본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한 데다,환율변동의 조정은 국내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다 취하고도 해결이 안 되는 위기상황의 경우에만 할 수 있기 때문에 사후약방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IMF 체제가 시작부터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