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CEO 나의 청춘 나의 삶] (5)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上)
임종욱 대한전선 사장(59)은 학창시절 수학을 무척 싫어했다.

제대로 배울 기회가 적었던 탓인지 도무지 원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만만했던 청년 임종욱에게 수학은 거의 유일한 아킬레스건이었다.

첫 대학입시에서 수학을 망쳐 낙방의 고배를 마신 임 사장은 재수 끝에 시작한 대학생활(고려대 경영학과)에서도 통계학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수리와 통계만 나오면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였다.

그랬던 임 사장이 오늘날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가운데 최고의 재무 전문가로 손꼽히게된 일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는 역발상의 귀재였다.

과감하고 때로는 모험적이고 도발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절망과 좌절 속에 뒷걸음질 칠 때 거꾸로 긍정과 낙관의 진격을 선택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살인적인 고금리로 신음하던 시절,임 사장은 외국계 은행과 유전스 거래를 통해 마련한 자금으로 만기 8년짜리 외국환평형기금채권(일명 외평채)을 사들였다.

이자율이 연 15%가 넘는 채권이었다.

2000년을 전후로 외환위기가 끝날 즈음에 외평채 가격은 두 배로 뛰었고 대한전선은 4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다.

대한전선은 이렇게 비축한 자금으로 무주리조트와 쌍방울(현 트라이브랜즈)을 잇따라 사들이며 인수·합병(M&A)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람들은 그저 의아해할 따름이었다.

재계에서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대한전선이 어느 날 갑자기 큰 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주리조트나 쌍방울을 보다 유리한 조건에 인수하기 위해 뜸을 들이고 있던 기업들은 대한전선의 전광석화와 같은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그랬던 임 사장도 2005년 말부터 격화되기 시작한 국내 M&A 시장에서는 한 발을 뺀 채 관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지금은 그동안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며 내실을 다지는 것이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에서다.

여기에 최근의 기업 매물들은 갈 곳 없는 부동자금으로 인해 대부분 과대평가돼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그는 2005년 진로 입찰에서 하이트 컨소시엄에 밀려 탈락하면서 "내가 쓴 금액은 대한전선이 최대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우리보다 더 높은 금액을 써낸 기업은 인수 시너지를 더 낼 수 있는 복안을 갖고 있는 모양"이라고 말했다.

탈락자의 아쉬움이라고 전혀 찾아볼 수 없는,오히려 인수에 성공한 기업의 앞날을 걱정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경영자로서 임 사장은 큰 근육을 갖고 있는 무도가라기보다 무수한 잔 근육이 발달한 실전형 파이터였다.

책상머리의 전략 탐색보다는 경험과 직감을,어려운 이론보다는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작은 매뉴얼 하나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여기에 직장인은 모든 일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빈틈을 보이지 않아야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다고 여겼다.

스스로 을(乙)보다는 갑(甲)의 위치에 서고자 했다.

선천적으로 흡수력이 좋았던 그의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학창시절 그토록 자신을 괴롭혔던 수학과 통계도 회사 업무를 통해 어느 순간에 통달해 버렸다.

임 사장은 비교적 유복한 가정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부친 임완규씨(2003년 작고)는 어려서 일본 유학을 다녀온 화가였다.

해방을 전후로 화단에서 이름을 날렸던 유영국 이대원 권옥연씨 등과 동년배로 국전 추천작가 및 심사위원,홍익대 교수와 대한민국예술대상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던 인물.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난 임 사장은 북성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사대부중에 특차로 합격했다.

성적은 늘 상위권.하지만 부친의 사업이 점차 기울면서 집이 서대문에서 아현동,다시 북아현동과 대현동으로 이사를 가더니,급기야 당시로선 깡촌이나 다름없던 모래내 지역으로 내몰렸다.

그 와중에 경복고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는 불상사를 맞이했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주변에선 재수를 하거나 '2차 인문고'에 지망할 것을 권유했지만 임 사장은 뜻밖에도 선린상고 야간을 선택했다 자존심을 구긴 스스로에 대한 징벌이었을까,아니면 예민한 사춘기 시절의 모험적 일탈이었을까.

임 사장은 "낮에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상업학교에 진학했지만 현실과 이상에는 차이가 있었다"고 털어놨다.

초저녁에 등교해 밤 11시까지 공부를 하는 야간 상고의 생활은 무척 단조로웠다.

처음 다짐대로 여기저기에서 아르바이트도 했지만 어린 고등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참 잡념이 많았던 시절이에요.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들이 모두 학교에 가있는 낮시간 동안 저는 하릴없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었거든요."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임 사장은 마음 속의 갈등을 접고 대학입시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벼락치기 공부에 나름대로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

그 즈음 부친이 홍익대에서 교편을 잡게 돼 집안사정도 나아졌다.

그런데 막상 입시준비에 들어가자 당시 상고에선 가르치지 않던 수학이 최대 걸림돌로 떠올랐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미분과 적분의 원리를 깨우칠 수가 없었다.

워낙 기초가 없다 보니 응용도 제대로 안 됐다.

그래도 다른 과목들을 믿고 연세대학교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결과는 낙방….준비기간이 워낙 짧았던 탓이다.

두 번째 맛보는 쓴 잔이었다.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