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심각했던 대공황으로부터 미국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을까.

이 또한 대공황의 원인 못지않게 경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 과정 역시 거시경제학의 양대 조류가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케인지언들은 뉴딜정책에 의한 유효수요의 창출 효과를 말하고,통화론자들은 금융위기의 종식과 통화량의 증대를 꼽는다.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말할 때 으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뉴딜정책일 것이다.

1933년 3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곧바로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했다.

뉴딜정책의 기본정신은 이른바 3R라고 불리는 구제(relief) 회복(recovery) 개혁(reform)으로 우선 당장 먹고 살기 힘든 사람을 도와주고,경제 전체를 공황 이전의 수준으로 되돌린 다음,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뉴딜정책은 금융 농업 공업 정부지출 등 크게 4개 부문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들 정책의 공통점은 물가 하락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정책은 먼저 달러화를 평가절하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종전에 금 1온스당 20.67달러였던 것을 31.26달러로 달러 가치를 낮추었다.

또한 은화의 무제한 주조,달러화의 신규 발행 증대 등을 통해 물가 상승을 꾀하고자 했다.

동시에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를 창설하고,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만들어 독립적 통화정책을 수립·시행하도록 했다.

농업정책은 농산물 공급을 축소함으로써 가격 상승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정부에서는 곡물과 면화 낙농제품 등 농산물에 대해 전체 생산 규모를 정해두고 이를 농민들에게 할당하는 방식으로 생산을 제한했고,그 대신 농민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렇게 되면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하고 구매력이 회복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공업정책은 1차대전 이후 복구과정에서 기업들의 지나친 경쟁이 불필요한 위험을 증대시키고 기업의 도산과 실업 증대의 원인이 되었다고 보고,기업 간의 경쟁을 제한하기 위해 자율 규제를 도입한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공업에서도 생산의 억제를 통해 균형가격을 회복시킴으로써 기업의 적정이윤을 보장해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노동자들에게도 단체교섭의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소득 증대와 구매력 강화을 꾀했다.

정부지출면에서도 1933년 13억달러,34년 28억달러,35년 25억달러,36년 34억달러의 적자재정을 편성해서 적극적인 재정팽창정책을 시행했다.

특히 공공사업의 확대를 통한 정부지출 증대를 꾀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이 테네시계곡개발국(TVA)을 통한 윌슨댐 건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뉴딜정책의 효과에 대해서는 많은 경제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통화 증대를 위해 화폐 발행을 늘린 것은 규모가 작아서 실제로 효과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려우며,농산물 가격 상승 또한 농민들의 구매력은 향상시켰을지 모르나 도시근로자의 구매력을 손상시킨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공업정책 역시 경쟁을 제한한 것이 오히려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으며,근로자들의 임금 상승은 노동에 대한 수요를 제약함으로써 실업을 줄이는 데 역효과를 냈다는 것이다.

정부지출 역시 적자재정에 의한 재정팽창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그 규모가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대공황을 반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경제학적으로 볼 때 재정정책의 효과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재정정책이 충분치 못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공업생산은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1929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실업률 역시 2차대전이 일어난 시점까지도 10%를 넘는 수준이었다.

결국 경제정책으로서의 뉴딜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회에서 재정정책에 대한 평가와 함께 뉴딜정책의 의미를 종합해 본다.

노택선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