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김신배 SK텔레콤 사장(52)은 점심을 먹고 나면 서울 인사동 화랑가를 휘적 휘적 다녔다.
기와로 지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전통차도 팔았던 경인미술관이나 빨간 벽돌 바닥에 대학을 갓 졸업한 신예 화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했던 관훈미술관이 단골로 찾는 갤러리였다.
당시 그가 일하던 곳은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SI(시스템 통합)업체인 '동양시스템 하우스'.경영지원본부장이 그의 직함이었다.
차세대 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던 통신사업의 주역이 되겠다는 야심에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나고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중견 건설업체 대호에서 무선호출 사업을 추진하다가 실패했던 쓰라린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데이콤 지분을 갖고 있던 동양그룹으로 옮기고 나서도 통신사업을 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다시 삼성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계속 할 수도 없고….이래저래 고역이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머리 속이 복잡하던 그 시절엔 정감 있는 인사동 뒷골목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는 일이 유일한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김 사장은 국내 최대 이동통신회사인 SK텔레콤의 CEO가 됐다.
4년이라는 세월을 절치부심한 끝에 보란 듯이 꿈을 이뤄냈다.
김 사장은 마흔살 즈음에 직장과 업종을 모두 바꿔 성공한,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스토리를 엮어낸 주인공이다.
좋은 머리로 일류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에 안착했지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을 계속 채찍질한 덕분이다.
김 사장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나는 집을 팔아 유학을 떠났던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세'가 보장된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왔다.
78년 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들어갔지만 실제 근무는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던 삼성물산에서 했다.
1983년 여름 그는 갑자기 유학을 결정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집안에서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갖고 있던 조그마한 아파트를 팔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도 처분해 유학길에 올랐다.
"거창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를 몇 년 다니다 보니 '내가 기업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디다.
실력이 달리고 경제와 경영의 흐름을 읽는 시야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5년 미국에서 돌아와 삼성전자 해외사업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물산 근무 시절 상사로 모셨던 주영만 당시 삼성전자 뉴욕 지사장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공장 건립 프로젝트를 맡아 실력을 발휘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89년 VCR 수출팀장을 맡은 데 이어 90년(부장)엔 능력을 인정받아 그룹 비서실에 입성했다.
삼성의 해외 투자와 글로벌 인재 육성 전반의 업무를 맡았던 그는 삼성의 해외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임원 승진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비서실 생활이 1년 반쯤 지나자 왠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선호출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중견 건설회사 대호라는 곳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게 됐다.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맡아 통신사업을 총괄해 달라는 제의였다.
당시 비서실의 황영기 이사(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가 극구 말렸지만 이미 통신사업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를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대호는 사업자 선정 입찰에서 탈락해버렸다.
백지상태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업무를 챙겨가며 입찰에 매달렸던 김 사장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건설업을 하자고 삼성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다음 귀착지는 동양그룹이었다.
그렇지만 동양 역시 통신사업을 밀어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자 여력이 달렸고 조직의 경험도 일천했다.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으로 옮긴 것은 95년 7월.'스트라투스(STRATUS )'라는 통신 관련 민간포럼에 자주 나갔던 김 사장을 표문수 SK텔레콤 전 사장이 눈여겨 보고 있다가 영입한 것이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SK에 인수돼 민영화 1년을 맞이하고 있던 터였다.
사업전략 담당 이사를 맡아 주도면밀한 기획력과 추진력을 앞세워 단시일 내 SK텔레콤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잡았다.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순리라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김 사장은 고도성장이 끝나가는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게 돼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보냈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던 때와 비교해 '불행하다'는 표현까지 했다.
하지만 인생역전과 같은 허황된 꿈만 가지지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몸을 빼 새로운 일에 과감하게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어차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다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
기와로 지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전통차도 팔았던 경인미술관이나 빨간 벽돌 바닥에 대학을 갓 졸업한 신예 화가들의 작품들을 전시했던 관훈미술관이 단골로 찾는 갤러리였다.
당시 그가 일하던 곳은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SI(시스템 통합)업체인 '동양시스템 하우스'.경영지원본부장이 그의 직함이었다.
차세대 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던 통신사업의 주역이 되겠다는 야심에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지도 벌써 3년이 지나고 있었다.
두 번째 직장이었던 중견 건설업체 대호에서 무선호출 사업을 추진하다가 실패했던 쓰라린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떠올랐다.
데이콤 지분을 갖고 있던 동양그룹으로 옮기고 나서도 통신사업을 하기는 여의치 않았다.
다시 삼성으로 돌아가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마음에도 없는 일을 계속 할 수도 없고….이래저래 고역이었다.
"이대로 모든 것이 끝나나 하는 불안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머리 속이 복잡하던 그 시절엔 정감 있는 인사동 뒷골목과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는 일이 유일한 위안거리였습니다."
그리고 10년이 지나 김 사장은 국내 최대 이동통신회사인 SK텔레콤의 CEO가 됐다.
4년이라는 세월을 절치부심한 끝에 보란 듯이 꿈을 이뤄냈다.
김 사장은 마흔살 즈음에 직장과 업종을 모두 바꿔 성공한,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스토리를 엮어낸 주인공이다.
좋은 머리로 일류대학을 나와 괜찮은 직장에 안착했지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을 계속 채찍질한 덕분이다.
김 사장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번의 승부수를 던졌다.
하나는 집을 팔아 유학을 떠났던 일이고 나머지 하나는 '출세'가 보장된 삼성그룹 비서실을 박차고 나온 것이다.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산업공학과를 나왔다.
78년 1월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들어갔지만 실제 근무는 병역특례를 받을 수 있던 삼성물산에서 했다.
1983년 여름 그는 갑자기 유학을 결정한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와튼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제대로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해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학비와 생활비.집안에서 도움을 받을 형편이 아니었다.
결국 갖고 있던 조그마한 아파트를 팔고 돈이 될 만한 물건들도 처분해 유학길에 올랐다.
"거창한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회사를 몇 년 다니다 보니 '내가 기업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게 됩디다.
실력이 달리고 경제와 경영의 흐름을 읽는 시야도 좁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85년 미국에서 돌아와 삼성전자 해외사업부 과장으로 입사했다.
물산 근무 시절 상사로 모셨던 주영만 당시 삼성전자 뉴욕 지사장의 추천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공장 건립 프로젝트를 맡아 실력을 발휘했다.
삼성에서의 생활은 순탄했다.
89년 VCR 수출팀장을 맡은 데 이어 90년(부장)엔 능력을 인정받아 그룹 비서실에 입성했다.
삼성의 해외 투자와 글로벌 인재 육성 전반의 업무를 맡았던 그는 삼성의 해외통으로 성장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했다.
임원 승진은 시간 문제였다.
하지만 비서실 생활이 1년 반쯤 지나자 왠지 갑갑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무선호출 사업 진출을 준비하던 중견 건설회사 대호라는 곳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게 됐다.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맡아 통신사업을 총괄해 달라는 제의였다.
당시 비서실의 황영기 이사(현 우리금융지주회사 회장)가 극구 말렸지만 이미 통신사업의 무한한 성장 가능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그를 돌려세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허망하게도 대호는 사업자 선정 입찰에서 탈락해버렸다.
백지상태에서 하나에서 열까지 모든 업무를 챙겨가며 입찰에 매달렸던 김 사장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건설업을 하자고 삼성을 나온 것도 아니었다.
다음 귀착지는 동양그룹이었다.
그렇지만 동양 역시 통신사업을 밀어붙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투자 여력이 달렸고 조직의 경험도 일천했다.
SK텔레콤의 전신인 한국이동통신으로 옮긴 것은 95년 7월.'스트라투스(STRATUS )'라는 통신 관련 민간포럼에 자주 나갔던 김 사장을 표문수 SK텔레콤 전 사장이 눈여겨 보고 있다가 영입한 것이다.
당시 한국이동통신은 SK에 인수돼 민영화 1년을 맞이하고 있던 터였다.
사업전략 담당 이사를 맡아 주도면밀한 기획력과 추진력을 앞세워 단시일 내 SK텔레콤의 핵심 브레인으로 자리잡았다.
"어려운 순간이 닥쳐도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눈높이를 맞추면서 시간을 갖고 기다리는 것이 순리라는 지혜를 배웠습니다."
김 사장은 고도성장이 끝나가는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게 돼 취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무한한 연민을 보냈다.
자신이 대학을 졸업하던 때와 비교해 '불행하다'는 표현까지 했다.
하지만 인생역전과 같은 허황된 꿈만 가지지 않는다면 평범한 일상의 흐름에서 몸을 빼 새로운 일에 과감하게 도전해볼 것을 권했다.
"어차피 사람의 능력이라는 것은 다 비슷하다고 봐야 합니다.
문제는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죠."
조일훈 한국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