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 김중수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

☞한국경제신문 7월 20일자 A39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진전되는 과정에서 흔히 들려오는 소리가 국익에 도움이 안 되면 협상을 중단하겠다는 것이다. 정부당국자,협상담당자,정치지도자들의 한결같은 소리다. 일견 당연한 말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공허(空虛)하게 들리는 측면도 있다.

국익에 반하더라도 추진할 수 있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닐 텐데,국익을 말하는 사람들은 각자 국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국민의 동의를 얻은 개념인가? 국민 개개인이 잘사는 것과는 다른 개념인가? 국익은 세계경제를 보는 시각과 정책목표에 따라 달리 정의된다. 글로벌 추세가 세계경제를 더욱 경쟁적으로 만들고,이 결과로 불평등이 심화된 현상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환경에선 글로벌경제의 긍정적 효과는 극대화하고 부작용은 최소화하면서 빈곤층 친화적인 성장(pro-poor growth)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 유능한 정부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런 전략은 경제사회를 포지티브섬(positive sum)으로 발전시킬 것인가,아니면 제로섬(zero sum)으로 유지할 것인가에 좌우된다. 전자는 성장정책을 통해 모든 사람의 절대적 후생증진에,후자는 사회정책을 통해 상대적 격차해소에 정책의 우선순위를 두게 된다.

성장과 분배의 논리에 비유될 수 있겠지만,이 두 개념 모두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기에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으며,오직 시대상황에 따라 국민의 의견을 반영해 적절하게 선택하게끔 돼있다.

속어로 표현하면 배고픔 해결과 배아픔 해결 간의 선택이다. 고령화가 급속히 진전돼 성장잠재력이 저하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포지티브섬을 선택해야 하는가,아니면 제로섬을 선택해야 하는가? 국익 정의의 갈림길이다.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좋은 의도의 정책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 예는 많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나쁜 정책의 기준은 대개 계층을 분열시켜 사회의 응집력을 저해하는 것이다.

왜 좋은 의도를 갖고 추진한 정책이 국가의 번영을 초래하지 못하는 나쁜 결과를 나타낼까? 일반적으로 제도와 관행과 정책 간 괴리에 기인한다.

교육과 의료를 예로 들어 보자. 부자는 자녀들의 더 좋은 교육을 위해,그리고 본인의 건강유지를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할 의향이 있다. 그러나 이를 제도적으로 제약함으로써(물론 이념적 요인에 의거) 세제가 역진적이 되고,결과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자원이 부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는 아이러니를 가져오게 된다.

한편 국내에서 우리끼리만 경제활동을 한다면 제로섬(나의 행복이 남의 불행) 환경이 맞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국제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히면 포지티브섬이 가능하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결국 국익은 어떠한 이념에서 경제현상을 파악하고,어떠한 정책을 선택하는가에 달려 있으며,누구나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왜 지도자들은 국익을 강조하고 있을까? 지금은 많은 나라에서 참여민주주의가 시도되고 있다. 정치권을 포함한 정부와 시장의 기존 조직에 시민사회가 이들 기존 조직의 기득권화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민사회가 전문성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경우에는 합리적 대안모색보다 군집행동을 우선시하게 되고,이런 조직에는 불명료한 의미의 국익이라는 이념의 사용이 어필할 수 있는 것이다.

장기이득을 가져오더라도 단기고통이 수반될 경우 이를 국익에 반한다고 주장할 개연성은 없을까? 한 사회의 발전요인은 다수 있겠지만 비공식적 제도라 할 수 있는 관행과 사고방식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 사회는 경륜을 지닌 전문가 계층의 사회봉사활동 참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사회의 전문가 계층이 소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조직은 결국 정치적 의사결정을 천박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최근 전문가 위주로 시민조직이 활성화되는 희망이 보인다. 이것이 우리 사회운영의 전반적 격조를 높이고,전문가 계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방법으로 발전되기를 기대한다.


* 이번호와 지난호 고전읽기를 참고하십시오.고대 그리스 철학의 원조이기도 한 소크라테스는 비전문가인 대중 혹은 군중들이 국가적 의사결정을 심각하게 왜곡시킨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요즘과 별로 다를 것이 없군요.

이 칼럼을 집필한 김중수 교수는 국내 최고의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장을 지내면서 정부 정책에 많은 쓴소리를 했던 분이기도 합니다.


< '국익'으로 포장된 집단주의 없는지 >

정치가나 시민단체들이 국익을 들먹인 것은 사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몇년 전 국군을 이라크에 파병할 때 찬성론자들은 국익을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라고 설명했고 지난해 황우석 박사의 줄기세포 조작 사건이 보도됐을 때 황 박사 지지자들은 국익을 거론하며 당시 언론 보도를 비판했다. 최근 한·미 FTA 협상을 둘러싼 찬반 논쟁 과정에서 국익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김중수 경희대 교수가 이에 토를 달고 나왔다.

국익은 과연 무엇인가? 사전을 들춰 보면 '국가의 이익으로 개인·단체·계층 또는 일부 지역의 이익보다 상위에 있고, 모든 것에 앞서서 추구되어야 하는 이익'이라고 설명돼 있다.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모든 공무원들이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하는 의사 결정 기준이다.

하지만 필자는 현실 사회에서 사전적 정의만큼이나 분명한 국익 기준을 찾기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어떠한 이념에서 경제 현상을 파악하고,어떠한 정책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국익이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부가 빈곤층을 고려하는 성장 전략(pro- poor growth)을 마련할 때 포지티브섬 정책(성장정책)과 제로섬 정책(분배정책)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익의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국내 기준으로는 제로섬 정책이라도 국제 무대로 활동범위가 넓어지면 포지티브섬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국익은 누구나 쉽게 그 기준을 쉽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정책결정자들이 찬반 논쟁이 벌어지는 사회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국익을 강조하는 것은 현대 사회의 의사결정에 여러 시민사회(시민단체)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시민단체가 정책 결정 참여 과정에서 충분히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 경우 합리적 대안보다 군집행동(집단행동)을 우선 선택하게 되고 따라서 이런 조직에는 국익이라는 불명료한 단어가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어떤 정책이 제시됐을 때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에 이득이 될 수 있어도 단기적으로 아픔이 뒤따르는 경우 국익을 핑계로 채택되지 않을 위험도 경계하고 있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전문가 계층이 시민단체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박주병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jb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