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의 원인 및 진행과정에 대해 케인지언들은 지출측면에서 소비,투자,정부지출,순수출 등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통화론자들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평범한 일시적 경기후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불황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대공황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펴는 통화론자들 가운데 대표 주자는 노벨상 수상자인 밀튼 프리드먼과 그의 동료였던 안나 슈워츠였다.
이들은 '미국 화폐사'라는 저서에서 전통적인 케인지언들의 유효수요설을 반박하면서 대공황은 경기침체의 발생→일련의 외적 통화쇼크→통화량의 감소→이에 대한 정부,특히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적절하지 못한 대응으로 인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슈워츠는 초기 경기침체가 발생한 것은 1920년대로 전후 복구와 이에 따른 붐으로 주식시장에서 투기 열풍이 발생했고,정부가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금융긴축을 실시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1927년과 1928년 사이 3.8%의 증가율을 기록했던 총통화(M2)는 이듬해 증가율이 0.4%로 뚝 떨어졌고,이로 인해 1929년 여름부터는 경제활동이 눈에 띄게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경기침체는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 붕괴를 비롯한 일련의 통화쇼크로 은행 파산이 증가하고 통화량이 더욱 위축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들이 꼽는 통화쇼크는 주식시장 붕괴와 1930년 10월에서 1931년 2월까지의 1차 은행위기,1931년 3월부터 1931년 8월까지의 2차 은행위기,1931년 9월에 있었던 영국의 금본위제 이탈,1932년 10월부터 1933년 3월까지의 3차 은행위기 등이다.
은행위기란 금융회사들의 파산이 집중된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은 특히 일반인들의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통화량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통화공급은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공급과 공개시장조작,금리조정 등을 통해 조정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현금선호 성향 역시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에 영향을 줌으로써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민간은행은 예금을 받고 이 가운데 일정부분을 지급준비금으로 떼어 놓은 후 민간에 대출을 해줌으로써 예금과 대출이자의 차이를 얻는 사업을 한다.
통화량은 개념(통화,총통화,총유동성)에 따라 포괄범위가 다르긴 하지만 민간이 가지고 있는 현금과 예금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가진 돈을 은행에 예금하면 이는 당연히 (예금으로서) 통화량의 일부가 된다.
은행에서 이 돈을 다시 대출해줌으로써 민간으로 흘러나오게 되면 이는 또한 (현금으로서) 통화량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흘러나온 돈을 다시 은행에 예금하고,은행은 다시 이 돈을 대출해줌으로써 통화량은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금을 가지고 있는 민간은 현금 모두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을 것이다.
이 중 일부를 떼고 은행에 예금한다고 할 때,현금으로 떼 놓은 비율을 현금보유 성향으로 본다.
따라서 현금보유 성향이 커지면 당연히 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은 약해지게 마련인 것이다.
통화론자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즉 일련의 통화쇼크,특히 은행위기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은행에 대한 신뢰가 크게 하락했고,이것이 통화량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930년과 1933년 사이 파산한 은행 수는 9000여개에 달했는데 이는 1929년 말 미국 전체 은행 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은행 파산이 늘어나면서 당연한 결과로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고,현금보유 성향은 크게 높아졌다.
따라서 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통화량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통화론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적극적인 통화팽창정책을 시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
그러나 통화론자들의 설명은 전혀 다르다.
이들은 평범한 일시적 경기후퇴 정도로 끝날 수 있었던 불황이 미국 정부의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대공황이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을 펴는 통화론자들 가운데 대표 주자는 노벨상 수상자인 밀튼 프리드먼과 그의 동료였던 안나 슈워츠였다.
이들은 '미국 화폐사'라는 저서에서 전통적인 케인지언들의 유효수요설을 반박하면서 대공황은 경기침체의 발생→일련의 외적 통화쇼크→통화량의 감소→이에 대한 정부,특히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적절하지 못한 대응으로 인한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슈워츠는 초기 경기침체가 발생한 것은 1920년대로 전후 복구와 이에 따른 붐으로 주식시장에서 투기 열풍이 발생했고,정부가 이를 가라앉히기 위해 금융긴축을 실시했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1927년과 1928년 사이 3.8%의 증가율을 기록했던 총통화(M2)는 이듬해 증가율이 0.4%로 뚝 떨어졌고,이로 인해 1929년 여름부터는 경제활동이 눈에 띄게 위축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경기침체는 1929년 10월의 주식시장 붕괴를 비롯한 일련의 통화쇼크로 은행 파산이 증가하고 통화량이 더욱 위축되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들이 꼽는 통화쇼크는 주식시장 붕괴와 1930년 10월에서 1931년 2월까지의 1차 은행위기,1931년 3월부터 1931년 8월까지의 2차 은행위기,1931년 9월에 있었던 영국의 금본위제 이탈,1932년 10월부터 1933년 3월까지의 3차 은행위기 등이다.
은행위기란 금융회사들의 파산이 집중된 것을 말한다.
이런 상황은 특히 일반인들의 금융기관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려 통화량이 크게 위축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통화공급은 중앙은행이 본원통화의 공급과 공개시장조작,금리조정 등을 통해 조정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의 현금선호 성향 역시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에 영향을 줌으로써 통화량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민간은행은 예금을 받고 이 가운데 일정부분을 지급준비금으로 떼어 놓은 후 민간에 대출을 해줌으로써 예금과 대출이자의 차이를 얻는 사업을 한다.
통화량은 개념(통화,총통화,총유동성)에 따라 포괄범위가 다르긴 하지만 민간이 가지고 있는 현금과 예금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가진 돈을 은행에 예금하면 이는 당연히 (예금으로서) 통화량의 일부가 된다.
은행에서 이 돈을 다시 대출해줌으로써 민간으로 흘러나오게 되면 이는 또한 (현금으로서) 통화량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흘러나온 돈을 다시 은행에 예금하고,은행은 다시 이 돈을 대출해줌으로써 통화량은 크게 늘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민간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이다.
그런데 여기서 현금을 가지고 있는 민간은 현금 모두를 은행에 예금하지 않을 것이다.
이 중 일부를 떼고 은행에 예금한다고 할 때,현금으로 떼 놓은 비율을 현금보유 성향으로 본다.
따라서 현금보유 성향이 커지면 당연히 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은 약해지게 마련인 것이다.
통화론자들은 여기에 주목했다.
즉 일련의 통화쇼크,특히 은행위기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의 은행에 대한 신뢰가 크게 하락했고,이것이 통화량을 크게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930년과 1933년 사이 파산한 은행 수는 9000여개에 달했는데 이는 1929년 말 미국 전체 은행 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것이다.
은행 파산이 늘어나면서 당연한 결과로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 자체를 꺼리게 됐고,현금보유 성향은 크게 높아졌다.
따라서 은행의 신용창출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통화량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통화론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적극적인 통화팽창정책을 시행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 대공황을 초래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