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 김경준 딜로이트 투쉬 파트너 >

☞한국경제신문 7월3일자 A38면

최근 교육계 일각에서 현행 교육제도가 학생 서열화를 강요하고 학력에 따른 차별을 심화시킨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서열화의 정점에는 대학입시가 있다는 인식 아래 차별 철폐를 위해 학력이 아니라 인간성을 기준으로 대학입학을 허용하고 평준화(平準化)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조차 나오는 실정이다.

공부할 학생을 실력과 의지가 아니라 인간성 기준으로 뽑자는 이 주장은 일견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는 월드컵에서 활약할 국가대표 선수를 축구실력이 아니라 인간성을 보고 뽑자는 것과 마찬가지로 낭만적 공상에 가깝다. 월드컵 대표팀을 축구실력이 아니라 인간성으로 선발한다면 성격 무난한 선수들로 팀을 만들 수는 있어도 강한 팀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어렵다. 게다가 국가대표 후보군인 수백 명 선수의 인간성 평가도 쉽지 않지만 매년 수십만 명 규모 입시생의 인간성을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을 축구실력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은 차별(差別·discrimination)이 아니다. 선수들의 차이(差異·difference)를 인정하는 것이다. 실력 있는 사람 누구에게나 기회는 열려 있지만 모두에게 동일한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백 번 양보해서 월드컵 국가대표팀을 축구실력 기준으로 선발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수 전체를 서열화하고 숭고한 스포츠 정신을 훼손하는 차별적 정책이라는 주장을 인정해,인간성을 기준으로 선발한다고 하자. 우리 국민들은 세계적 스타들이 각축을 벌이는 월드컵 본선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을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고,우리나라가 동네축구 수준에서 맴돌아야 하는 대가를 치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교육계 일각의 현실인식에서 가장 결여된 관점이 바로 '차별과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최근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우리 사회 일각의 공통적인 현상이고,우리 공동체가 선진화되기 위해서 '차별은 없다. 그러나 차이는 인정한다'는 관점 정립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한다. 차별이란 '키,인종,성별,출신지역' 등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선천적(先天的) 특성을 기준으로 기회 자체를 제한하는 것이다. 차이란 '실력,성과,성실도,적성' 등 후천적(後天的) 노력에 따른 다름을 인정하며,다름에 따른 프리미엄을 인정하되 기회 자체는 제한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누구에게나 일정 수준 불만족스럽기에,자신의 문제를 부당한 사회적 차별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 사회에서 '차별 철폐'는 항상 대중에 대한 호소력도 높을 뿐더러 '차별 없는 사회'를 앞세운 정치적 구호들은 그 현실적 가능성과 무관하게 흥행이 잘 된다. 그러나 조직과 공동체가 차별과 차이의 다름을 사려 깊게 생각해 보지 않고,비현실적 평등개념에 휘둘려서는 번영할 수 없다.

건전한 자본주의 사회는 기회의 균등을 추구하는 곳이지 결과의 평등을 보장하는 곳이 아니다. 칼 포퍼는 "이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지상에 지옥을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고 갈파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차별 철폐와 결과의 평등을 내세워 지상천국을 약속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이들이 정작 만들어낸 것은 인간의 창의성과 자율성을 압살하는 지상지옥이었다. 반면 인간능력의 한계와 각자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에 따른 건전한 경쟁의 원칙을 정착시켜 온 사회는 불완전하지만 현실에서 작동하는 선진화된 사회로 발전했다.

최근 교육문제를 비롯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커지고 있는 '차별 철폐'의 목소리는 합리적 논의를 통해 갈무리될 수 있는 사회적 지향점 수준을 넘어 종교적 도그마에 가까워지고 있다. 인간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인정해야 하는 모든 차이를 차별이라고 강변하는 비현실적 평등논리는 우리사회의 선진화를 위해 넘어야 할 대표적인 사고방식이다.

< 기회는 누구에나 … 차이는 인정해야 >

한번 가정해보자.올해부터 성적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원하는 대학문을 열어준다.

서울대 의대든 법대든 원하는 대학,원하는 학과에 들어갈 수 있다.

수많은 학생들이 환호성을 내지를지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공부로부터 해방돼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전 국민이 모두 다 서울대 의대 출신이라면 서울의대 타이틀이 지금과 같은 '효용'이 있을까?

자,또 다른 가정을 해보자.올해부터 모든 국민들은 나라가 정해주는 직장에 들어가서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매달 300만원씩을 똑같이 월급으로 받기로 한다.

청년실업 문제는 깨끗이 해소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과연 종업원들은 개인이나 회사의 '발전'을 위해 노력할까? 조직이,산업이,그 나라가 발전할 수 있을까?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상향'을 그리던 사회주의 경제가 몰락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센티브의 결여였다.

경쟁을 장려하고 인센티브를 부여하지 못한 결과 애초 의도한 이상과 달리 '무기력한 개인'과 '무기력한 국가'가 양산됐다.

'차별없는 사회'는 어디에도 없는 상상 속 유토피아에 불과했다.

김경준 딜로이트 투쉬 파트너는 시론에서 "선천적 특성을 기준으로 기회를 제한하는 차별과 후천적 노력에 따른 다름인 차이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기회 자체를 제한하지는 않되 차이에 따른 프리미엄은 인정해야 한다 △차별 철폐라는 미명 아래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비현실적 평등주의에 휘둘려서는 국가와 개인이 발전할 수 없다 △평등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그것이 '결과의 평등'이라고 착각해선 곤란하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평등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논리다.

비현실적 평등주의는 '배아픈 문화'와 통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처럼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는 마인드로는 발전할 수 없다.

남이 잘되면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 그보다 더 잘되기 위해 절치부심 노력하는 것이 개인과 사회 발전을 위한 지름길이다.

열심히 노력해 성공한 사람을 우대하는 것이 가로막혀서는 안 된다.

스스로 노력해 성공하는 경제·사회 주체들을 우대할 줄 알되 성공하려는 노력의 문을 공평하게 열어주는 사회가 진정 이상적인 사회는 아닐까?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김혜수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