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독일 월드컵 축구로 즐거웠습니까?"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사람이 77.9%였다.

조별 리그 G조 마지막 경기인 한국-스위스전이 끝난 뒤 한국갤럽이 전국의 15세 이상 남녀 5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다.

"그렇지 못하다"고 대답한 사람은 19.6%.10명 가운데 8명은 월드컵으로 인해 즐거웠다니 이만하면 대단한 만족도 아닐까.

더구나 한국에서 열린 대회도 아니고,한국이 우승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월드컵을 즐기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한국과 토고·프랑스·스위스의 경기가 있던 날 거리는 온통 붉은 색 물결로 출렁거렸다.

경기가 시작되기 몇 시간 전부터 사람들은 서울 시청 앞 광장으로,광화문으로,상암월드컵경기장으로,잠실야구장으로 모여들었다.

부산 대구 광주 등 지방 도시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사람들이 응원단을 형성했다.

한국의 마지막 조별 예선 경기인 스위스전만 해도 전국 257곳에서 165만명이 거리응원에 나섰다고 경찰은 추산했다.

예선 세 경기가 치러지는 동안 '붉은 악마'가 되어 거리로 나선 사람은 모두 480만명가량.한국 사람 10명 가운데 1명가량은 거리응원에 나선 셈이니 참 대단한 열기다.


◆월드컵은 즐김과 축제의 마당

도대체 어디서 이런 열기와 에너지가 나오는 것일까.

무엇이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낸 것일까.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골목에서 광장으로 놀이터가 바뀐 데 주목한다.

이 교수는 최근 펴낸 책 '이어령 문화코드'에서 "원래 한국의 문화코드에는 광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광장 대신 골목이 존재했으나 월드컵의 거리 응원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낯선 사람과 함께 춤을 추고 기쁨을 나누는 이벤트에 약한 한국인들은 이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한데 어울려 춤추고 노래한다"고 해석했다.

또한 붉은악마가 발산하는 '대~한민국'의 함성은 나라 이름을 자랑스럽고 친근한 것으로 바꿔놓았다고 그는 평가했다.

월드컵이 즐김과 축제의 마당으로 승화된 것이라는 해석도 많다.

월드컵은 매개체일 뿐 거리응원 자체가 즐거운 축제라는 얘기다.

몸짓과 소리,공통의 지향점과 연대감이 어우러지면서 신명나는 한바탕 놀이터가 된다는 것이다.

거리응원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었던 점이 이를 말해준다.

축구는 잘 몰라도 응원 자체가 재미있고 신났다는 사람도 많았다.

얼굴에 알록달록한 그림을 그리고 태극기로 옷을 만들어 입거나 망토처럼 걸치고 다녀도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낯선 사람들과 함께 박수치며 즐거워할 수 있는 곳,대로를 무단 점거하고 활보해도 괜찮은 '일탈'의 시기.

자기 표현에 대한 일상적인 통제가 무너지고 저마다 자유롭게 개성을 표출할 수 있는 축제의 장으로서 월드컵을 즐겼다는 것이다.

한민족 고유의 굿판 문화가 심층에 잠재돼 있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라는 해석,일제강점과 분단의 역사 속에서 남을 지나칠 정도로 의식하며 살아오다 억제된 것을 발산하는 쾌감 때문에 모여든다는 설명,젊은 여성이 대거 '붉은 악마'가 된 것은 옛날 우리의 여인들이 단오에 널뛰기 하면서 담장 바깥의 세상을 보려던 것과 같은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나라에서 수백만의 인파가 도심 광장에서 붉은 색 물결을 이룬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역설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또다른 획일주의는 경계돼야

그러나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은 법.수백만 '붉은 악마'의 거리응원에 대한 우려와 반론도 적지 않다.

아무리 국가대표 축구팀의 경기를 응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해도 그토록 많은 인파가 유니폼처럼 붉은 색 옷을 입고 모여드는 것이 과연 괜찮은 것인가 하는 것이 먼저 제기되는 우려다.

집이나 술집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월드컵을 즐긴 사람도 많았지만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군중이 형성되는 현상이 정상적일까 하는 것이다.

월드컵에 대한 열광이 지나쳐 또다른 획일주의를 낳고 있다는 지적이 그래서 나온다.

물론 전체주의가 횡행하던 과거의 획일주의와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지만 월드컵 때 빨간 티셔츠를 입지 않으면 이상해지는 분위기라면 그야말로 이상하다는 얘기다.

거리응원에 비판적인 네티즌들의 의견을 봐도 그렇다.

남이 가니까 나도 간다는 식으로 너무 휩쓸린다는 점,텔레비전에는 채널마다 온통 월드컵 프로그램뿐이라는 점,지나친 노출이나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무분별한 애정행각,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중심주의….축구 경기가 끝난 후 인파 속에 갇힌 승용차 운전자는 "밖에서 차를 흔들어 대는 바람에 극도의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아주 일부이긴 하지만 버스 위에 올라 타거나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는 사례도 있었다.

프랑스·스위스와의 경기 응원을 마친 뒤 지하철과 버스에서 졸고 있는 젊은 여성들 가운데는 노출이 지나쳐 아슬아슬한 경우 또한 적지 않았다.

거리응원 때문에 영업을 아예 포기해야 했다는 택시 기사의 손실과 마음고생은 누가 보상해줄까.

그렇다고 해서 거리응원의 부정적 측면이나 이에 대한 우려를 과장하거나 비약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수백만 인파가 모였어도 외국의 훌리건처럼 폭력적이지 않았고 낯선 사람들에게도 선뜻 마음을 열 만큼 개방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남긴 쓰레기가 눈살을 찌푸리게 했지만 이내 다음 경기부터는 놀았던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떠나는 '착한 악마'로 돌아가지 않았던가.

한국의 독특한 응원문화는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새로운 '한류 코드'로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거리응원을 지원하기 위해 지하철이 연장 운행하고 교회에서 새벽 3시에 예배를 보거나 각종 연극·전시 등의 시간을 조정하는 등 월드컵 응원에 모든 사회적인 시간표를 맞추는 현상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대세다.

남은 것은 거리응원이 좀 더 신나고 건강한 축제로 발전하기 위해 부정적 측면과 이에 대한 우려를 없애는 일이다.

서화동 한국경제신문 문화부 기자 fire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