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10월24일 미국의 주가는 폭락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때 사용되는 'crash'란 단어가 사용될 정도로 그 충격은 엄청나서 많은 사람이 자살하고,경제 전체가 심각한 공황의 늪으로 빠졌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전 세계를 휩쓴 대공황(Great Depression)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공황은 미국에서 가장 심각한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그 여파는 유럽과 아시아 등 세계 모든 나라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자본주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전무후무했던 '거시경제적 사건'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대공황 시기에 미국에서는 1933년 국민총생산이 1929년에 비해 25%나 감소한 것을 비롯 소비·투자 등 거의 모든 거시경제지표가 큰 폭으로 하락했고 물가 또한 폭락했으며,실업률은 1933년 25%에 달하기까지 계속 높아졌다.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났고 금융회사의 파산이 몇 차례에 걸쳐 거대한 파도처럼 발생했다.

1차대전 이후 전후 복구과정을 거치면서 1920년대 붐을 이루었던 세계 경제와 미국 경제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엄청난 상황을 맞이했던 것일까? 대공황의 원인은 무엇이고,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렇게까지 심각한 불황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른바 뉴딜정책으로 알려져 있는 미국 정부의 경제회복 정책은 어떤 내용이었고,그러한 정책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앞서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경제사적 '사건'이 모든 면에서 학술적 차원의 논쟁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 바 있는데 대공황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대공황의 원인과 경과,회복과정에 대해 경제사학자들 사이에 날카로운 견해의 대립이 존재하는 것이다.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세기의 경제적 사건이었던 대공황에 대해,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경제학적 논리에 대해 살펴보자.

대공황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거시경제적' 사건이었다.

따라서 대공황을 둘러싼 논쟁은 대부분 거시경제학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는 통화론자들과 케인지언(케인즈 학파 경제학자) 사이에서 거시경제적 논리에 근거하여 진행되고 있다.

특히 대공황의 원인을 둘러싼 논쟁은 테민논쟁으로,이들 양대 학파 사이의 대립이 가장 첨예한 부문이라고 할 수 있다(테민논쟁은 앞으로 자세히 소개할 예정이다).

보다 깊이있는 경제학 차원의 대공황 원인에 대해서는 잠시 뒤로 미루고 여기서는 현상적 차원에서 대공황의 원인(원인이라기보다는 계기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지만)에 대해 간략히 설명해 보자.

1920년대 미국 등 세계경제는 전후 복구에 힘입어 상당한 전성기를 구가한다.

이는 곧 주식시장 활황으로 이어졌고 이 같은 주식투자 붐은 특히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졌다.

미국에서 주식시장이 활황세를 보인 것은 결국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자본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초래했고,이는 국제금융시장의 금리 상승으로 이어졌다.

국제 금리가 상승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는 주로 1차산품 수출에 의존하던 채무국들이었다.

원리금 상환 부담이 가중되면서 이들 채무국들은 국제시장에 1차산품의 공급을 크게 늘리게 됐고,이에 따라 1차산품의 국제 시세가 폭락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미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바로 농산물 가격으로 원면과 밀의 국제 가격 하락은 미국 농촌에 직격탄을 날렸다.

농촌의 소득 감소로 인한 소비 감소,농촌 은행들의 파산 등 경제 불황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고,이 같은 사태를 걱정한 정부에서는 관세를 인상해 농촌을 살려보려고 했다.

그러나 관세는 대외적인 문제므로 다른 나라의 보복관세를 불러일으키게 되고,마침내는 관세전쟁의 양상으로 진전되게 마련이다.

그 결과는 당연히 세계 교역량의 감소로 나타났고,이것 역시 불황의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주식시장의 폭락은 이러한 상황에서 대공황의 기폭제가 된 것으로 볼 수 있다.(Smoot Hawley 관세법은 주식 폭락 이후인 1930년에 입법되었지만 관세 인상은 1928년 대통령 선거 당시 후버의 주요 공약 가운데 하나였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