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비릿하다,묵근하다….이 친근하고 섬세한 표현을 잘못 쓴 말이라니요?"
작가 이윤기씨가 2000년 7월 한 신문을 통해 이의를 제기했다.
바로 전 시인이자 '우리말 지킴이'를 자처하는 권오운씨가 '알 만한 사람들이 잘못 쓰는 우리말 1234가지'에서 문인들의 문법적 오류를 비판한 데 대해서다.
권씨는 이 책에서 고은,박경리,정현종,박완서,이문열,이윤기씨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작가 50여명의 작품을 꼼꼼하게 걸렀다.
이에 대해 이윤기씨가 반론을 펴자 권씨는 재반론으로 맞받았다.
비문(非文)논쟁이란 표준어 문법과 작가의 어휘 변조 여부 간에 벌어지는 시시비비다.
그 핵심은 '문학적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에 있다.
대개 그것은 표준어와 사투리 간 경계의 모호성,의미자질과 관련한 단어 사용의 적절성 또는 단어 간 호응 문제,수사적 표현의 타당성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1959년 경향신문을 통해 벌어진 김동리와 이어령씨 간의 '험악한'(우리말 연구가 남영신 선생의 표현) 논쟁 역시 '어법과 은유'에 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이른바 '문법적 잣대'로 '시적 언어'를 어디까지 재단할 수 있을까? 성급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관점의 차이를 알아두는 게 더 중요하다.
- (이어령의 작품에 대한 김동리의 지적) '피들이 흘러가는 혈맥들''서기한 광채''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피들이 흘러가는 혈맥들'은 영어 복수법의 직역인 모양인데,우리말은 달라서 '피가 흘러가는 혈맥들'이라고 한다.
'서기한 광채'는 아마 '瑞氣한 光彩'인 모양인데 '瑞氣'는 명사다.
명사 밑에 '한'이 붙어도 좋다면 '人間한''地球한''赤色한'도 다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는 어느 외국어 사투리인지 짐작할 길이 없다.
- (이어령의 반론) '피들이 흘러가는 혈맥'은 <유리공화국>이라는 상징적 산문시에 나오는 말이다.
피에 '들'이 붙은 것은 만화영화에서 개개 혈구가 영양분을 운반하는 그 작업 광경처럼 피에 아니미스틱한 생명감을 준 알레고리다.
'손을 다쳤다.
피들이 흘러나온다'하면 잘못이다.
그러나 '피들의 작업'이라 하면 알레고리가 되기 때문에 하등의 모순이 될 수 없다.
'서기하는 광채'는 기호지방 특히 충청도에서 쓰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인광처럼 퍼렇게 빛나는 것을 '서기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될 만한 표준어가 없기에 방언을 그대로 썼다.
'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는 <실명한 비둘기>라는 산문시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전쟁으로 눈을 잃은 비둘기의 이야기다.
슬픈 마음을 울어볼 눈조차 없다는 것이다.
50여년 전에 벌어진 논쟁이지만 제기된 문제들은 요즘 글쓰기에서도 여전히 유념해야 할 것들이다.
독자들은 누구 말이 옳다고 볼지 궁금하다.
대가들의 논쟁에 감히(?) 끼어들 처지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은 문법적 잣대로 들여다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사법으로 자신의 글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문법적으로 부적절한 표현과 은유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 것인지가 문제를 푸는 열쇠인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
작가 이윤기씨가 2000년 7월 한 신문을 통해 이의를 제기했다.
바로 전 시인이자 '우리말 지킴이'를 자처하는 권오운씨가 '알 만한 사람들이 잘못 쓰는 우리말 1234가지'에서 문인들의 문법적 오류를 비판한 데 대해서다.
권씨는 이 책에서 고은,박경리,정현종,박완서,이문열,이윤기씨 등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 작가 50여명의 작품을 꼼꼼하게 걸렀다.
이에 대해 이윤기씨가 반론을 펴자 권씨는 재반론으로 맞받았다.
비문(非文)논쟁이란 표준어 문법과 작가의 어휘 변조 여부 간에 벌어지는 시시비비다.
그 핵심은 '문학적 표현의 한계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에 있다.
대개 그것은 표준어와 사투리 간 경계의 모호성,의미자질과 관련한 단어 사용의 적절성 또는 단어 간 호응 문제,수사적 표현의 타당성 등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1959년 경향신문을 통해 벌어진 김동리와 이어령씨 간의 '험악한'(우리말 연구가 남영신 선생의 표현) 논쟁 역시 '어법과 은유'에 관한 관점의 차이에서 비롯됐다.
이른바 '문법적 잣대'로 '시적 언어'를 어디까지 재단할 수 있을까? 성급한 답을 내리기보다는 관점의 차이를 알아두는 게 더 중요하다.
- (이어령의 작품에 대한 김동리의 지적) '피들이 흘러가는 혈맥들''서기한 광채''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피들이 흘러가는 혈맥들'은 영어 복수법의 직역인 모양인데,우리말은 달라서 '피가 흘러가는 혈맥들'이라고 한다.
'서기한 광채'는 아마 '瑞氣한 光彩'인 모양인데 '瑞氣'는 명사다.
명사 밑에 '한'이 붙어도 좋다면 '人間한''地球한''赤色한'도 다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는 어느 외국어 사투리인지 짐작할 길이 없다.
- (이어령의 반론) '피들이 흘러가는 혈맥'은 <유리공화국>이라는 상징적 산문시에 나오는 말이다.
피에 '들'이 붙은 것은 만화영화에서 개개 혈구가 영양분을 운반하는 그 작업 광경처럼 피에 아니미스틱한 생명감을 준 알레고리다.
'손을 다쳤다.
피들이 흘러나온다'하면 잘못이다.
그러나 '피들의 작업'이라 하면 알레고리가 되기 때문에 하등의 모순이 될 수 없다.
'서기하는 광채'는 기호지방 특히 충청도에서 쓰는 말이다.
어둠 속에서 인광처럼 퍼렇게 빛나는 것을 '서기한다'고 한다.
이에 해당될 만한 표준어가 없기에 방언을 그대로 썼다.
'슬픈 마음을 울 눈도 없이 고독했다'는 <실명한 비둘기>라는 산문시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전쟁으로 눈을 잃은 비둘기의 이야기다.
슬픈 마음을 울어볼 눈조차 없다는 것이다.
50여년 전에 벌어진 논쟁이지만 제기된 문제들은 요즘 글쓰기에서도 여전히 유념해야 할 것들이다.
독자들은 누구 말이 옳다고 볼지 궁금하다.
대가들의 논쟁에 감히(?) 끼어들 처지는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한 사람은 문법적 잣대로 들여다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수사법으로 자신의 글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문법적으로 부적절한 표현과 은유 사이의 경계를 어떻게 그을 것인지가 문제를 푸는 열쇠인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기자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