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본위제는 영국에서 이미 18세기에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한 것은 1819년이었다.
앞서 산업혁명기 영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구축효과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영국은 1793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금 유출이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1797년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영국 내에서는 금본위제의 부활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이 진행되었고,마침내 1819년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국제적으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독일 영방들(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에는 여러 개의 영방으로 구성돼 있었다)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러시아,중국 등은 여전히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금과 은을 통화의 표준으로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1870년대까지 유지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경우 그레샴의 법칙으로 통화의 안정적 운용이 어렵다.
시장에서 금은의 수급에 따라 가치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840년대 말과 1850년대 초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호주 등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가 1859년에는 미국의 네바다에서 대량의 은이 생산되면서 또다시 은의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금과 은의 흐름은 상당히 어지럽게 요동쳤고,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던 나라들은 통화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상당히 고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본위제가 1870년대까지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동전을 만드는 기술적 이유로 금화의 가치가 너무 높아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단위의 금화도 근로자의 3~4일치 임금에 해당될 정도였으니 더 작은 단위인 은화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로 은화의 유통을 금지시키는 것,즉 폐화(demonetization)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은화를 폐화시킬 경우 전체적으로 통화가 줄어들게 되고 이는 물가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전통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부채가 많은 농민들이었다.
물가가 하락하면 실질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다.
네트워크 효과란 한마디로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화라고 할 수 있다.
전화는 아무리 비싼 전화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을수록 내 전화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주변에서 이러한 예를 더 찾아보자) 다른 사람이 사용함으로써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i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화제도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다른 나라들과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거나 자본거래를 하면서 어떤 제도를 택하는가에 따라서 효율성이 달라질 수 있다.
영국과 같이 이미 금본위제를 채택한 나라도 있고 아직 은본위제를 고집하는 나라도 있다면 중간에서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네트워크 외부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과 독일의 중간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는 이런 이유로 복본위제를 유지했다.
또한 영국과 교역이 많았던 스웨덴 같은 경우에도 은본위제를 기본으로 하되 영국과의 교역을 고려해 금본위제를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이 복본위제를 시행하고 있다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동전을 사용할 때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각국으로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복본위제로부터 금본위제로 통화체제가 바뀌어간 것도 결국 네트워크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사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
그러나 공식적으로 영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한 것은 1819년이었다.
앞서 산업혁명기 영국의 경제성장과 관련해 구축효과에 관한 논쟁을 소개하면서 언급한 바 있듯이 영국은 1793년부터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영국으로부터 금 유출이 발생하자 영국정부는 1797년 금태환을 정지시켰다.
1815년 나폴레옹의 패전으로 전쟁이 끝나자,영국 내에서는 금본위제의 부활을 둘러싼 여러 가지 논쟁이 진행되었고,마침내 1819년 공식적으로 금본위제를 채택했던 것이다.
하지만 금본위제는 국제적으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독일 영방들(독일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 이전에는 여러 개의 영방으로 구성돼 있었다)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러시아,중국 등은 여전히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고,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은 금과 은을 통화의 표준으로 사용하는 복본위제를 1870년대까지 유지했다.
앞의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경우 그레샴의 법칙으로 통화의 안정적 운용이 어렵다.
시장에서 금은의 수급에 따라 가치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1840년대 말과 1850년대 초 미국의 캘리포니아와 호주 등에서 대량의 금광이 발견되면서 금의 가격이 크게 하락했다가 1859년에는 미국의 네바다에서 대량의 은이 생산되면서 또다시 은의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국제적으로 금과 은의 흐름은 상당히 어지럽게 요동쳤고,복본위제를 채택하고 있던 나라들은 통화체제를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상당히 고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본위제가 1870년대까지 유지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명이 있다.
첫 번째는 동전을 만드는 기술적 이유로 금화의 가치가 너무 높아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가장 작은 단위의 금화도 근로자의 3~4일치 임금에 해당될 정도였으니 더 작은 단위인 은화로 보완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치적 이유로 은화의 유통을 금지시키는 것,즉 폐화(demonetization)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은화를 폐화시킬 경우 전체적으로 통화가 줄어들게 되고 이는 물가 하락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전통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계층은 상대적으로 부채가 많은 농민들이었다.
물가가 하락하면 실질부채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이른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s)다.
네트워크 효과란 한마디로 어떤 재화나 서비스의 사용자가 많아질수록 그 재화나 서비스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을 말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전화라고 할 수 있다.
전화는 아무리 비싼 전화기를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경우 아무런 가치가 없다.
많은 사람이 전화기를 가지고 있을수록 내 전화기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다.(주변에서 이러한 예를 더 찾아보자) 다른 사람이 사용함으로써 가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네트워크 외부성(network externalitie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통화제도를 채택하는 경우에도 다른 나라들과 재화나 서비스를 거래하거나 자본거래를 하면서 어떤 제도를 택하는가에 따라서 효율성이 달라질 수 있다.
영국과 같이 이미 금본위제를 채택한 나라도 있고 아직 은본위제를 고집하는 나라도 있다면 중간에서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네트워크 외부성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과 독일의 중간에 위치했던 네덜란드는 이런 이유로 복본위제를 유지했다.
또한 영국과 교역이 많았던 스웨덴 같은 경우에도 은본위제를 기본으로 하되 영국과의 교역을 고려해 금본위제를 병행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국가들이 복본위제를 시행하고 있다면 복본위제를 채택하는 것이 동전을 사용할 때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각국으로 산업혁명이 확산되고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복본위제로부터 금본위제로 통화체제가 바뀌어간 것도 결국 네트워크 효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경제사의 묘미가 아닐 수 없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