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칼럼 박효종 서울대 교수 · 정치학 >

☞한국경제신문 5월22일자 A39면

괴테의 명작인 '파우스트'를 보면 파우스트가 마녀의 부엌에서 젊음을 다시 얻게 해 줄 마녀의 술을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있다.

황홀한 술잔 앞에 서서 그는 갑자기 놀라운 환상을 본다.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의 그림자가 술잔 속에 나타나자 아찔해져 넋을 잃는다.

그러자 악마 메피스토는 그의 곁에 서서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그를 조롱한다.

파우스트가 본 것이 실존하는 여인의 형상이 아니라 파우스트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메피스토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선거의 계절에 생뚱맞게 이 이야기가 생각나는 까닭은 무엇인가.

멸사봉공하는 지역일꾼이 되겠다고 출마한 사람들과 그들이 벌이는 '말의 성찬'을 접하면서 우리는 실제가 아니라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공약은 책임있는 약속어음과 같은 것이어서 근거없는 환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점검하기 위해 시민단체들이 나서서 메니페스트운동을 벌이고 있기는 하지만,그 실효성은 두고 보아야 알 일이다.

우리가 보기에 환상의 실체는 공약에 거품이 끼여 있을 가능성보다는 정치 자체에 허황된 기대를 갖도록 만든다는 사실에 있다.

지금 정치인들은 죽을 맛이다.

팔자에도 없는 꼭짓점 댄스도 추고 특별한 색깔의 옷을 입으며 때로는 절도 하고 또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 등,평소에 안 하던 일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하고 있다.

표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요즘처럼 정치인들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점을 실감하는 때도 없다.

생각해 보면 정치의 힘은 이처럼 위대한 것이다.

생전 춤도 출 줄 모르고 절도 안 해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일을 선뜻 하도록 만드니 말이다.

하지만 우려할 만한 일이 있다.

정치를 통해 아예 이 세상과 자신의 지역을 통째로 바꾸겠다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또 정치를 통해 행복과 희망을 주겠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는 '오버'하지 말고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란 사람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주기는커녕,불안과 실망만 주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정부·여당은 새로운 행정수도를 만든다고 하면서 마치 '행복도시'를 만들 수 있는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복합도시'를 만들 수는 있을지언정 '행복도시'를 만들 수는 없다.

그 누구도 행복을 줄 수 없는 이유는 돈이나 물질로 행복을 얻겠다고 나서면 오히려 불행만 초래되는 '행복의 역설' 현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을 없애는 일은 비교적 쉽다.

배 고파 우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 울음을 그치지 않는가.

그렇다면 '행복도시'를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약속보다는 '불행도시'를 만들지 않겠다는 가능한 약속을 할 필요가 있다.

또 최근 정부가 '버블세븐'을 거론하며 특정지역의 부동산 거품을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도 행복은커녕 불안을 조성하는 일이다.

'버블'이 정말 터지면 강 둑이 터진 것처럼 엄청난 재앙이 된다.

경제위기의 조짐이 있다고 작년에 언론이 경고할 때는 불안감만 조성하는 무책임한 언론이라고 공세를 피던 정부가 이번에는 '버블세븐'이 터지는 사태가 임박한 것으로 연일 난리를 치니 사람들은 좌불안석이다.

정치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갖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버블세븐'이 곧 터진다고 불안감을 조성하고 또 '행복도시'를 만들겠다며 큰소리를 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을 뿐더러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소치다.

"너 자신을 똑바로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경구를 정부와 정치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느낌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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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 가장 고민스러운 대목이 바로 첫머리일 터다.

첫 인상이 사람의 이미지를 좌우하듯 글 역시 첫 문장·첫 단락이 '독자'(평가자)의 시선을 다음으로 이동시키느냐 마느냐를 판가름내기 때문이다.

'시선'을 붙잡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가 '부드러운 시작'이다.

잘 알려진 우화나 이야기,책에서 발췌한 내용 등을 인용해 '친숙함' 이나 '흥미'를 끌어낸 후 하고 싶은 주장을 이어가는 방식이다.

박효종 교수는 칼럼에서 "정치의 기본은 행복과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불안이나 실망을 주지 않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정부와 정치인이 '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꼭짓점 댄스 등을 동원한 '선거쇼'와 함께 헛 공약을 남발해 유권자들에게 헛된 희망을 주거나, 정부가 앞장서 특정 지역의 부동산 거품 붕괴를 거론하며 불안감을 주는 행위들은 정치의 기본에서 동떨어진,요새말로 '오버'라는 평가다.

이 같은 주장을 펼치기 앞서 박 교수는 괴테의 명작 '파우스트'에 나오는 일화로 첫 단락을 열고 있다.

정치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정부와 정치인의 각성을 촉구하는 무거운 주제지만 '파우스트'를 읽은 사람이건 아니건 옛날 이야기 형식을 빌린 첫머리에 흥미를 가질 법 하다.

칼럼의 논지 흐름을 살펴보자.

(도입) 파우스트는 실존하지 않는 여인의 환상에 넋이 나갔다.

(본론)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출마한 후보자들이 무수한 공약을 내걸고 표심을 유혹하고 있다.

정부 역시 각종 장밋빛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정치가 국민들에게 환상을 심고 있다.

(결론) 정부와 정치인은 정치의 본질이 국민들이 안정감을 갖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의 시작에서 일화나 이야기를 인용할 때 주의할 점은 차후 이어질 내용과 긴밀히 연결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박 교수는 정부나 정치인의 '오버'가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가 모든 것을 해주리라는 허황된 기대를 부추기거나 과도한 불안감을 조장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첫 단락에 인용된 '파우스트의 여인'은 바로 정치가 양산하고 있는 '환상'을 은유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포석인 것이다.

주장과 딱 맞아떨어지는 적절한 '이야기'일 때 그 효과를 높일 수 있다.

김혜수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기자 dear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