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월13일 대통령 연두 기자회견장-"일본에서는 천황(天皇)이라고 하지요. 나는 일본 왕이라 해야 하나,천황이라 써야 하나….아직 준비를 못했습니다."

한 기자가 '임기 중 일본 천황의 방한(訪韓)을 추진할 생각은 없는지'를 묻자 노무현 대통령이 답변하면서 이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2005년 2월1일 외교부 장관 브리핑-"노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천황'이라고 할지 일왕(日王)이라고 할지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고 했는데,한국 정부 입장은 뭔가?"(일본 산케이신문 특파원) "일본 왕은 천황으로 부르는 것이 정부 방침이다."(반기문 외교부 장관)

#이에 앞서 2002년 1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도 연두회견에서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중략)천황과 일왕에 대한 견해는?" "호칭은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일반적 군주라는 면에서 '일왕'이라는 말을 쓸 수 있고,어느 한 나라의 고유명칭이라면 '천황'이라 할 수 있다.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


세 개의 장면은 각각 '천황'이란 말을 둘러싼 한국과 일본의 미묘한 반응과 관점들을 보여준다.

존대어법이 발달해 있는 한국과 일본에서 상대방에 대한 호칭은 매우 민감한 문제다.

'천황'의 경우는 여기에다 '일제의 강점'이라는 역사적 경험까지 더해져 거부감을 일으켜온 단어다.

우리 정부는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訪日)에 앞서 일본의 왕을 공식적으로 '천황'으로 부르기로 했다.

이에 따라 일부 언론에서도 표기를 바꿨는데,그 배경으로 나온 게 '그 나라에서 부르는 대로 써준다는 외교적 관례,다른 나라에서도 천황으로 호칭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천황'이란 말의 정체는 무엇인가.

'천황'은 일본어 '덴노(天皇;てんのう)'를 우리 한자음으로 읽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격을 낮추어 '일왕'이라 부르기도 한다.

'천황'을 받아들이는 쪽은 이 말이 일본의 고유한 용어이며 덴노이즘(천황주의) 등과 더불어 지금 세계적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런 마당에 우리만 '일왕'을 고집하는 것은 지나친 민족주의적 피해의식의 반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왕'을 주장하는 쪽에선 '천황'이란 말이 일본의 용어,즉 외래어이므로 이에 준해 옮겨 쓰면 그만이라고 한다.

미국 국가 수반인 President를 대통령이라 칭하듯이 '일왕'이란 표현은 일본의 '천황'을 번역한 말일 뿐이라는 게 요지다.

내각제를 취하고 있는 영국의 수상 역시 우리식의 총리로 바꿔 쓰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구태여 민족주의적 관점을 결부시킬 필요도 없다는 것.

말의 힘은 의식을 담는다는 데 있다.

역으로 말에 담긴 의미는 사람의 의식을 지배한다.

어쨌든 이 말은 옳고 그름의 개념으로 접근해서는 풀기 어렵고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다.

물론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에는 가능한 한 많은 이유들이 제시돼야 할 것이다.

홍성호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