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이 얼마나 잘 통합되어 있었는가의 문제는 구축효과에 관한 논쟁에서 매우 중요한 축을 이루고 있다.

윌리엄슨의 주장대로라면 당시 영국의 자본시장은 잘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국채 발행이 증가하면 국채 가격은 떨어지고,따라서 이자는 상승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채권시장에서 채권 가격이 떨어지면 채권의 액면가격과 실제 거래 가격 사이의 차이가 커진다.

만기가 되었을 때 채권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액면가로 돌려받기 때문에 액면가와 실제 거래가의 차이가 이자가 되는 셈이다.)

결국 민간부문에서 투자되던 많은 자금이 국채시장으로 몰려들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국채 발행의 증대가 민간투자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자본시장이 얼마나 잘 통합되어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당시 영국의 기업들은 회사를 세워 생산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본 확보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단순히 자본시장에 충분한 자본이 존재했었는가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였다.

당시 기업들이 자금난을 겪었던 것은 주로 정보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새로운 기업들이 대규모로 창설되는 상황에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그 기업이 무엇을 만드는 회사인지,또 그렇게 생산된 물건에 충분한 수요가 있는지에 관해 별다른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과 자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사이에서 정보의 불균형 문제가 발생한다.

자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불확실한 대상에 투자하기를 꺼릴 것이고,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자신의 돈 (가령 이전에 벌어 놓았던 이익 등)을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조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만일 영국이 전쟁을 하지 않아서 국채발행이 늘지 않았고,따라서 국채시장에서의 이자가 높아지지 않았더라도 그 돈이 민간에 투자되기는 어려웠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수익률의 크기에 따라 자금을 이동시키는 자본시장의 통합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이야기다.

구축효과에 관한 윌리엄슨의 주장에 대해 국제자본 거래의 측면에서 반박한 학자들도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적으로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 왔고,그래서 두 나라 국민들의 머리 속에는 일종의 라이벌 의식 같은 것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특히 대조적인 면을 드러낸 것은 두 나라 정부가 전쟁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영국은 자본시장이 잘 발달되어 있어서 (비록 완전한 자본시장의 통합을 이루진 못했다 하더라도) 국채 발행과 같은 '경제적' 방법을 통해 전비를 조달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자본시장의 발달이 더뎠고,결국 나폴레옹은 정복지에서 부유한 사람들의 돈을 빼앗는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륙의 거대 상인과 같은 돈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위험을 피해 영국으로 자금을 도피시키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으로 도피한 대륙의 자본은 그 정확한 규모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상당한 액수라는 것은 많은 사료(史料)를 통해 알려져 있다.

더욱이 영국의 의회는 외국으로부터 자본이 들어오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자소득세를 면제해 주는 조치를 취하기까지 했다.

영국 내로 들어온 이들 도피 자본은 어디에 투자되었을까.

대부분의 자본은 안정적이고 수익성도 좋은 국채에 투자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결국 영국 정부는 전쟁 때문에 국채발행을 늘렸지만,전쟁을 피해 들어온 대륙의 자본이 국채의 상당 부분에 투자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 구축효과는 없었거나,있었다 하더라도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수준이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일부 경제사학자들은 나폴레옹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것은 바로 자본의 흐름과 같은 경제적 측면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국의 산업혁명기에 구축효과가 있었는가에 관한 다양한 논쟁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역사란 경제학의 '실험실'이라고 설파한 노스의 명언이 새삼 실감나는 대목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