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 설명했듯이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란 정부가 재정지출을 늘림으로써 금리인상을 초래하고,이로 인해 민간투자가 감소하는 것을 말한다.

윌리엄슨은 이 같은 논리를 산업혁명 당시 영국의 상황에 적용했다.

그는 당시 영국 정부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국채발행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영국의 국내 자금시장에서 금리를 상승시켰고,이것이 민간투자를 감소시킴으로써 영국경제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영국 정부가 나폴레옹과의 값비싼 전쟁을 치르느라 민간의 자금을 싹 거둬갔기 때문에 민간에서 제대로 투자가 이뤄지지 못했으며,따라서 경제가 큰 폭으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국이 나폴레옹과 싸웠던 시기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다고 말하는 기간의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영국에서의 산업혁명은 1760년에서 1830년 사이에 있었다고 이야기되고,전쟁은 1793년부터 1815년까지였다.

따라서 우리가 흔히 산업혁명이라고 부르는 시기에 영국은 전쟁을 하느라 성장에 신경 쓰지 못했으니,산업혁명이라는 이름은 1820년 이후에나 붙여야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윌리엄슨은 반대가설(counterfactual hypothesis)이라는 영리한 방법을 동원해 이를 증명하고자 했다.

흔히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들 말하지만,최근 경제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에 반대되는 가설을 세우고 이를 근거로 가상적 상황과 실제상황을 비교함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하려는 방법을 종종 사용하고 있다.

이것이 이른바 반사실적 가설(반대가설)이다.

그는 '만일 영국이 프랑스와 전쟁을 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설을 세우고,영국 정부가 대외군사지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발행했던 국채가 전쟁이 없었다면 민간투자로 쓰였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 경우 민간투자 증가는 자본규모 확대,경제성장 향상으로 이어졌을 것이고,경제성장에 관한 이론에 근거해 대략적으로 그 규모를 추정해 보았던 것이다.

윌리엄슨은 1791년부터 1820년 사이 영국의 경제성장률은 연율로 0.85% 정도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당시 영국경제의 성장 추정치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통계를 보면 1780년에서 1801년 사이 영국의 경제성장률이 연 1.32%,1801년에서 1831년 사이에는 1.97%였으니,성장률이 연 0.85% 더 높았을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대단히 큰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추정치를 인정한다면 전쟁이 끝나고 난 후 1820년 이후를 산업혁명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윌리엄슨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많다.

먼저 앞서 설명한 구축효과라는 것이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이론적 근거가 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영국의 자본시장은 효율적이지 못해서,정부가 돈을 끌어다 쓴다고 하더라도 금리를 통해 민간투자에 주는 영향이 오늘날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과연 영국의 금리가 올랐는지,금리가 설령 올랐다 하더라도 국채에 투자되던 자금과 민간투자에 쓰이던 자금이 분리돼 있었다면 국채발행이 민간투자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이는 실질금리와 자본시장의 통합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구축효과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인 것이다.

실제로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의 영국 물가는 큰 폭의 상승세를 보였는데,따라서 물가상승을 감안한 실질 금리는 오히려 하락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물론 경제이론에서 실질금리는 물가상승이 아닌 기대물가상승을 반영해야 하는 것인데,이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과연 당시 영국 경제를 폐쇄경제로 보고,영국 정부와 민간이 국내 자금시장에서 서로 돈을 쓰려고 줄다리기를 했는가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외국자본이 영국으로 흘러들어올 상황 혹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고,구축효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해 볼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 교수 tsroh@hufs.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