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김정산 (소설가)
▶ 한국경제신문 2006년 3월 1일자 A23면
우리는 단군 이래로 5000년간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2000년 전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에 살던 마한,진한,변한의 토착민 세력이 있었고 북방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뿌리로 알려진 예맥(濊貊)족과 부여족이 있었다.
신라와 가야 종족은 이들과 또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 신라 지배층은 훈족(흉노족)의 한 갈래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게 정설이고,가야는 널리 알려진 수로왕과 허황옥의 로맨스에서 보듯 인도 계통의 유민 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 뿐 아니라 이들과 500년간 존속한 가야 6국까지 포함해 한반도에 살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서로 동족(同族)이란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역사에서 단군과 단일민족을 강조한 대표적인 경우가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단재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가 집필된 시기는 원나라 침략으로 고려조가 주권을 잃었을 때고 단재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분이다.
두 경우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단재는 신문에 연재한 미완성의 논설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했다고 주장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전에 지금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래한 백제인이라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상대의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데는 혈연만한 게 없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점에 주목했고 상당한 호감과 친밀감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요즘 젊은이들은 반미를 외치면서도 나이키와 맥도날드를 찾고,재즈를 듣고,일본 드라마를 보면서 월드컵에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친다.
우리나라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지구촌이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소비문화에 노출돼 자라온 세대들을 주축으로 취향과 이념이 분명하게 나뉘고 심지어 휴대폰과 MP3,노트북 같은 첨단장비를 갖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유로노마드(Euronomad)' 또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족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다고 이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과거에 비해 덜 애국·애족적인 것은 아니다.
이슈가 생기거나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땐 누구 못지 않게 열정적으로 뭉치고 단결한다.
우리도 2002년 월드컵에서,또 지금 다시 달아오르는 월드컵 열기에서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만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정신적 쇄국주의를 고수하는 일이 국익과 민족발전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을 가리켜 굳이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까닭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와 아랍권 국가들 간의 충돌처럼 지나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전 인류를 위태롭게 만드는 국제분쟁의 원인이 된다.
북한의 고립도 말끝마다 '위대한 장군님'을 외치는 그들만의 위험한 단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바뀌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념과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속적인 국가발전과 민족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거룩한 3·1절 아침 '세계의 변조(變朝)를 승(乘)한 오인(吾人)'이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는 진정한 3·1정신의 계승에 대해 생각해본다.
<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 >
[ 생각하기 + ]
# 우리는 단일 민족인가
# 단일 민족이 특별히 우수한가
# 민족과 국가는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가
# 일본의 '단일 민족' 신화가 남긴 피해는
# 다민족 국가의 장점은
# 중국은 단일 민족인가
# 멜팅 팟(melting pot)이란 무엇인가.
프로이센의 철학자 J G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조국 프로이센이 패하자 180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서 우국 대강연회를 열었다.
대중 앞에 선 그는 열변을 토했다.
"조국애에 있어서 국민이란 영원성의 용기다.
고상한 사람은 이 용기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제공하고,고상하지 못한 사람도 역시 자기를 희생하도록 명령받는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1808)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강연을 통해 독일 재건의 길을 제시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자긍심을 느끼도록 국민 정신을 진작(振作)해야만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설득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원천이다.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해왔던 철학자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히테가 그랬고,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가 그랬다.
민족 교육에 한 평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자가당착(自家撞着:언행의 앞뒤가 맞지 않음)의 모순에 빠져들 수 있다.
외세에 대한 대자(對自)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특정한 유형을 창조하고 이를 고수하려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단일 혈통으로 구성된 하나의 민족'이라고 잘못 생각하거나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등의 과거지향적 태도를 보이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김정산 소설가가 '시론'에서 지적한대로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우리 국민은 과거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부족들이 통합하고 외부와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물론 우리 민족성은 언어나 문화 등에서 다른 나라들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성이 외부 세계와 다르다고 해서 과거부터 줄곧 '단일'민족이 유지돼 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어떤 민족이든지 외부 세계와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형성돼 왔다.
패트릭 기어리가 쓴 두권의 책,즉 '메로빙거 세계(한 뿌리에서 나온 독일과 프랑스)'와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돼 왔던 유럽의 민족 형성과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국가가 등장할 무렵 정치지도자들이 민족 개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만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정신적 쇄국주의를 고수하는 일이 국익과 민족발전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김정산 소설가의 시론은 이런 점에서 되새겨볼 만한 글이다.
현승윤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hyunsy@hankyung.com
▶ 한국경제신문 2006년 3월 1일자 A23면
우리는 단군 이래로 5000년간 순수혈통의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2000년 전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한반도에 살던 마한,진한,변한의 토착민 세력이 있었고 북방에는 고조선과 고구려의 뿌리로 알려진 예맥(濊貊)족과 부여족이 있었다.
신라와 가야 종족은 이들과 또 다르다.
지금까지 연구된 바로 신라 지배층은 훈족(흉노족)의 한 갈래가 바다를 통해 들어왔다는 게 정설이고,가야는 널리 알려진 수로왕과 허황옥의 로맨스에서 보듯 인도 계통의 유민 집단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삼국시대엔 고구려 백제 신라 뿐 아니라 이들과 500년간 존속한 가야 6국까지 포함해 한반도에 살던 모든 나라 백성들이 서로 동족(同族)이란 개념을 가지지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역사에서 단군과 단일민족을 강조한 대표적인 경우가 고려 중기의 문신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와 단재 신채호가 저술한 '조선상고사'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제왕운기가 집필된 시기는 원나라 침략으로 고려조가 주권을 잃었을 때고 단재 역시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분이다.
두 경우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단재는 신문에 연재한 미완성의 논설 '독사신론(讀史新論)'에서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인 고구려와 백제를 멸했다고 주장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연전에 지금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의 조상을 도래한 백제인이라고 밝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상대의 적대감이나 경계심을 무너뜨리는 데는 혈연만한 게 없다.
당연히 우리는 그가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점에 주목했고 상당한 호감과 친밀감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한 세대가 가면 또 한 세대가 오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요즘 젊은이들은 반미를 외치면서도 나이키와 맥도날드를 찾고,재즈를 듣고,일본 드라마를 보면서 월드컵에선 목이 터져라 대한민국을 외친다.
우리나라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지구촌이 마찬가지다.
세계적인 소비문화에 노출돼 자라온 세대들을 주축으로 취향과 이념이 분명하게 나뉘고 심지어 휴대폰과 MP3,노트북 같은 첨단장비를 갖추고 세계를 돌아다니는 '유로노마드(Euronomad)' 또는 '디지털 노마드(Digital Nomad)'족도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다.
그렇다고 이들의 이념이나 행동이 과거에 비해 덜 애국·애족적인 것은 아니다.
이슈가 생기거나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땐 누구 못지 않게 열정적으로 뭉치고 단결한다.
우리도 2002년 월드컵에서,또 지금 다시 달아오르는 월드컵 열기에서 그 점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 우리만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정신적 쇄국주의를 고수하는 일이 국익과 민족발전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
일왕이 즉위식에서 자신을 가리켜 굳이 백제인의 후예라고 밝힌 까닭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미국 부시 행정부와 아랍권 국가들 간의 충돌처럼 지나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전 인류를 위태롭게 만드는 국제분쟁의 원인이 된다.
북한의 고립도 말끝마다 '위대한 장군님'을 외치는 그들만의 위험한 단결 때문이다.
시대가 변하고 문명이 바뀌면 그에 맞는 새로운 이념과 세상을 멀리 내다보는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 지속적인 국가발전과 민족번영을 기대할 수 있다.
이 거룩한 3·1절 아침 '세계의 변조(變朝)를 승(乘)한 오인(吾人)'이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하는 진정한 3·1정신의 계승에 대해 생각해본다.
< 대하소설 '삼한지' 작가 >
[ 생각하기 + ]
# 우리는 단일 민족인가
# 단일 민족이 특별히 우수한가
# 민족과 국가는 반드시 일치해야 하는가
# 일본의 '단일 민족' 신화가 남긴 피해는
# 다민족 국가의 장점은
# 중국은 단일 민족인가
# 멜팅 팟(melting pot)이란 무엇인가.
프로이센의 철학자 J G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는 프랑스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조국 프로이센이 패하자 1807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 베를린학사원 강당에서 우국 대강연회를 열었다.
대중 앞에 선 그는 열변을 토했다.
"조국애에 있어서 국민이란 영원성의 용기다.
고상한 사람은 이 용기를 위해서 기꺼이 자기 자신을 희생으로 제공하고,고상하지 못한 사람도 역시 자기를 희생하도록 명령받는다…."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1807∼1808)이라는 너무나도 유명한 강연을 통해 독일 재건의 길을 제시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에 자긍심을 느끼도록 국민 정신을 진작(振作)해야만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설득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통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자기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발산시키는 원천이다.
외세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해왔던 철학자들은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했다.
피히테가 그랬고,조선상고사를 쓴 신채호가 그랬다.
민족 교육에 한 평생을 바친 도산 안창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지나친 애착은 자가당착(自家撞着:언행의 앞뒤가 맞지 않음)의 모순에 빠져들 수 있다.
외세에 대한 대자(對自)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특정한 유형을 창조하고 이를 고수하려는 자기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다른 피가 섞이지 않은,단일 혈통으로 구성된 하나의 민족'이라고 잘못 생각하거나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고수해야 한다'는 등의 과거지향적 태도를 보이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김정산 소설가가 '시론'에서 지적한대로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우리 국민은 과거 여러 지역에서 등장한 부족들이 통합하고 외부와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물론 우리 민족성은 언어나 문화 등에서 다른 나라들과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성이 외부 세계와 다르다고 해서 과거부터 줄곧 '단일'민족이 유지돼 왔다는 증거가 될 수는 없다.
어떤 민족이든지 외부 세계와의 부단한 교류를 통해 형성돼 왔다.
패트릭 기어리가 쓴 두권의 책,즉 '메로빙거 세계(한 뿌리에서 나온 독일과 프랑스)'와 '민족의 신화 그 위험한 유산'은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돼 왔던 유럽의 민족 형성과정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 유럽사회에서 국가가 등장할 무렵 정치지도자들이 민족 개념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우리만 순수혈통과 단일민족을 주장하는 정신적 쇄국주의를 고수하는 일이 국익과 민족발전에 무슨 이득이 되겠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한 김정산 소설가의 시론은 이런 점에서 되새겨볼 만한 글이다.
현승윤 한국경제신문 경제교육연구소 연구위원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