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시절 몇몇 언론기관에서 발표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각각 67%와 44%와 32%로 제각각 다르게 나타나서 이를 놓고 한때 조작 의혹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이처럼 20%포인트 이상의 차이는 사회 각계에서 여론 조사의 신뢰도에 심각한 의문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내용을 알고 보면 그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명백했다.

조사 문항은 "김영삼 대통령이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잘못 수행하고 있다고 보십니까?"로 세 조사가 모두 같았다.

다만 응답 문항이 다르게 되어 있었다.

어떤 조사에서는 응답 항목이 '매우 잘하고 있다''비교적 잘하고 있다''그저 그렇다''별로 잘하지 못하는 편이다''매우 잘못하고 있다'는 5점 척도를 사용했다.

반면 한 조사에서는 '그저 그렇다'가 빠진 4점 척도를 사용했다.

응답 항목이 줄어들면 당연히 다른 응답 항목에 대한 응답이 증가하게 된다.

따라서 20% 정도의 지지도 차이는 '그저 그렇다'는 중립적 항목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따라서 어떤 조사가 맞고 틀리다고 단정 짓기보다는 응답 항목에 따라 차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설문에 따라서는 '그저 그렇다' 항목 대신에 '보통이다'라는 항목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면 중립 항목이 꼭 포함되어야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지지도나 투표와 같은 문항의 경우 어차피 지지하느냐 아니면 지지하지 않느냐로 결정될 테니까 중립 항목을 없애고 강제로 응답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반면 정치적이나 인간적으로 호(好) 불호(不好)의 감정이 분명하지 않은 부동층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중립 항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따라서 중립 항목의 포함 여부는 조사 목적에 따라 알맞게 결정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응답 항목에 대한 응답 비율을 높이려는 (혹은 낮추려는) 조사자의 의도가 개입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립 항목이 포함되면 그 중립 항목으로 응답이 몰리는 현상이 나타나서 긍정적 (혹은 부정적) 응답이 줄어든다.

다음의 기사는 TV에서 어떤 주제를 놓고 토론하는 중에 시청자들의 여론을 조사해서 이를 방송 도중 발표하는 프로그램에 관한 기사의 일부분이다.

동시에 수십만 명이 전화를 통해서 주제에 대한 자신의 찬반 의견을 알리고 토론의 끝부분에 여론을 종합한 것이 발표되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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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감한 이슈 '즉석' 여론조사 ]

'텔레비전을 보며 한순간에 수십만의 사람이 여론조사에 참여한다.'

SBS가 지난 가을개편과 함께 선보이는 '핫라인! 60분의 선택'은 찬반양론이 있는 주제를 놓고 생방송으로 시청자들의 여론을 조사해 이를 현장에서 발표하는 프로다.

대규모의 여론조사가 가능한 것은 컴퓨터와 영상 통신기술이 결합했기 때문이다.

은행의 ARS서비스를 이용하듯 찬성과 반대의 듯을 가진 시청자가 각각 해당되는 전화번호를 누르면 그 결과가 바로 SBS의 컴퓨터에 집계된다.

진행자 송지헌씨는 여론조사전문가의 도움을 얻어 이 결과를 현장에서 해석해 발표하게 된다.

현재 SBS가 방송시간 60분 내에 집계할 수 있는 최대참여자수는 50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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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그램의 문제는 찬성할 경우의 전화번호와 반대할 경우의 전화번호만 있다는 점이다.

물론 찬반으로만 나뉘어지는 주제를 방송국측에서는 선택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주제라도 중간적인 의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이들의 의사 표현은 막혀 있는 셈이 된다.

이 프로그램은 '북한 국적의 중국 교포에게 한국 국적 취득을 허가해야 하는가'를 하나의 주제로 다룬다고 한다.

과연 이 주제에 대해서 무조건 찬성과 무조건 반대 이외에는 의견이 없는 것일까?

더욱이 TV를 보지 않는 사람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TV를 보는 사람 중에서도 자기의사 표현에 적극적인(최소한 전화를 걸 정도로) 사람들만이 참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조사 결과를 전 국민의 여론으로 해석하는 데는 당연히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미군의 베트남 철수에 대한 국민 투표가 있었다.

투표 결과 37%가 즉각 철수 지지를,63%가 즉각 철수에 반대하였다.

당시 존슨(Johnson) 행정부는 이 결과가 정부 정책에 대한 지지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당시 여론은 베트남전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사람들은 대부분 점진적 철수를 원했던 것이다.

중간 의견을 선택할 기회가 없는 상황에서의 국민투표 결과는 이처럼 사람들의 의사를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김진호 교수 jhkim@kndu.ac.kr


[ 약력 ]

△서울대 경영대 졸업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 석·박사

△(전)KBS 선거예측조사 자문위원

△(현)국방대 경영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