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요타자동차가 내년 '세계 1위 자동차 회사'에 올라설 것으로 보인다.
도요타측도 내년 생산대수가 올해보다 10% 늘어난 연산 906만대를 기록,전통의 1위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추월할 것이라고 지난 19일 공식 선언했다.
120여년에 달하는 세계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미국도 유럽도 아닌 아시아 기업이 처음 '왕좌'에 오르는 것이다.
이 뉴스의 한 가운데 서있는 인물이 바로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회장(72)이다.
그는 10년 전 일본경제가 거품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던 시절,도요타와 일본경제 부활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꼭 10년 만에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의 수장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도요타의 괄목할 성장은 오쿠다 회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95년 사장 취임 당시 '타도 도요타'를 외쳤다.
자기 회사를 '타도'하자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충격적인 구호였다.
요는 기존의 경영관행에 묶여 있는 도요타를 타도해야 더 강한 도요타가 된다는 발상이었다.
당시 일본은 부동산 가격 폭락에 따른 부실 채권 문제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991년 240만대에 육박하던 일본 자동차 내수시장 규모는 200만대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내수시장의 절반(약 43%)을 장악했던 도요타의 점유율도 37%까지 떨어졌다.
결국 그는 '혁신'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상사 앞에서도 말을 돌리는 법이 없는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라며 '대기업병'에 걸린 당시 도요타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자기 회사 도요타 뿐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의 기적을 일군 '일본식 경영' 전반에 대해서도 칼끝을 겨누었다.
연공서열과 온정주의적 경영문화로는 일본경제의 버블을 해소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오쿠다 회장은 먼저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고 성과급제를 과감히 도입했다.
사내벤처를 육성하고 해외 지식인들을 불러들여 자문위원회도 만들었다.
시장 점유율 40%대 회복,유럽시장에서 정면 승부,미국 현지생산 대폭 확대,카레이스 F1 참전 결정 등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중에서도 중견 이상 간부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창의력 넘치는 젊은 조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고참 간부들을 계열사로 보내버리고 55세 이상 간부와 50세 이상 중견 간부의 권한을 크게 줄였다.
젊고 유능한 사원을 능력 순으로 발탁 승진시켰다.
이사회 평균 연령은 59세에서 57세로 순식간에 낮아졌다.
순발력이 요구되는 유도를 하며 체득한 오쿠다의 순간적 판단력은 '스피드 경영'이란 스타일로도 나타났다.
전임 다쓰로 사장이 몇년 동안 결론짓지 못했던 중국 톈진 공장과 미국 동부 엔진공장 건립 건을 이내 결정내렸다.
스피드 경영은 또 미래형 친환경 자동차인 하이브리드카(전기와 기름으로 가는 자동차) 개발에서 도요타가 선두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오쿠다 회장은 특히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를 생산원가의 3분의 2 가격인 대당 215만엔에 출시,화제를 모았다.
그렇다고 오쿠다 회장이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경리 출신인 데다 필리핀 근무를 오래한 탓에 사내 기반이 약했다.
전통적으로 도요타에선 생산과 기술파트를 거쳐야 사장에 오를 수 있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그의 등용으로 이 규칙은 여지없이 깨졌다.
좌천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받았던 필리핀 근무 중 거물급인 리카르도 시베리오를 상대로 거액의 미수채권을 해결해 주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오쿠다 회장은 도요타 가문 밖에서 CEO로 올라선 최초의 전문경영인이기도 하다.
도요타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로부터 '도요타 불패신화'의 기틀을 닦은 역대 2명의 '명 조련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50년 도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던 도요타를 기사회생시킨 고(故) 이시다 다이조 사장이 초대 조련사였다면 오쿠다 회장은 그 뒤를 잇는 스타다.
오쿠다 회장 이후 하나의 경영용어로 굳어진 '도요타 웨이'(Toyota Way)도 이제 세계 표준이 됐다.
도요타에 대한 연구는 오쿠다에 대한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편 오쿠다 회장은 영화광으로도 유명하고 한류붐을 일으킨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 영화는 물론 최지우 등 영화배우,한국 가수들에 대해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어 그를 만나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
도요타측도 내년 생산대수가 올해보다 10% 늘어난 연산 906만대를 기록,전통의 1위인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추월할 것이라고 지난 19일 공식 선언했다.
120여년에 달하는 세계 자동차 산업 역사에서 미국도 유럽도 아닌 아시아 기업이 처음 '왕좌'에 오르는 것이다.
이 뉴스의 한 가운데 서있는 인물이 바로 오쿠다 히로시 도요타자동차 회장(72)이다.
그는 10년 전 일본경제가 거품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던 시절,도요타와 일본경제 부활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꼭 10년 만에 세계 1위 자동차 기업의 수장 자리에 우뚝 서게 됐다.
도요타의 괄목할 성장은 오쿠다 회장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1995년 사장 취임 당시 '타도 도요타'를 외쳤다.
자기 회사를 '타도'하자니 이게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충격적인 구호였다.
요는 기존의 경영관행에 묶여 있는 도요타를 타도해야 더 강한 도요타가 된다는 발상이었다.
당시 일본은 부동산 가격 폭락에 따른 부실 채권 문제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1991년 240만대에 육박하던 일본 자동차 내수시장 규모는 200만대에 간신히 턱걸이했다.
내수시장의 절반(약 43%)을 장악했던 도요타의 점유율도 37%까지 떨어졌다.
결국 그는 '혁신'을 외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상사 앞에서도 말을 돌리는 법이 없는 그는 "변하지 않는 것이 가장 나쁜 일"이라며 '대기업병'에 걸린 당시 도요타에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자기 회사 도요타 뿐 아니었다.
1980년대까지 일본의 기적을 일군 '일본식 경영' 전반에 대해서도 칼끝을 겨누었다.
연공서열과 온정주의적 경영문화로는 일본경제의 버블을 해소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오쿠다 회장은 먼저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고 성과급제를 과감히 도입했다.
사내벤처를 육성하고 해외 지식인들을 불러들여 자문위원회도 만들었다.
시장 점유율 40%대 회복,유럽시장에서 정면 승부,미국 현지생산 대폭 확대,카레이스 F1 참전 결정 등이 모두 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이 중에서도 중견 이상 간부들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고 창의력 넘치는 젊은 조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고참 간부들을 계열사로 보내버리고 55세 이상 간부와 50세 이상 중견 간부의 권한을 크게 줄였다.
젊고 유능한 사원을 능력 순으로 발탁 승진시켰다.
이사회 평균 연령은 59세에서 57세로 순식간에 낮아졌다.
순발력이 요구되는 유도를 하며 체득한 오쿠다의 순간적 판단력은 '스피드 경영'이란 스타일로도 나타났다.
전임 다쓰로 사장이 몇년 동안 결론짓지 못했던 중국 톈진 공장과 미국 동부 엔진공장 건립 건을 이내 결정내렸다.
스피드 경영은 또 미래형 친환경 자동차인 하이브리드카(전기와 기름으로 가는 자동차) 개발에서 도요타가 선두로 나서는 계기가 됐다.
오쿠다 회장은 특히 하이브리드카 '프리우스'를 생산원가의 3분의 2 가격인 대당 215만엔에 출시,화제를 모았다.
그렇다고 오쿠다 회장이 순탄한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니다.
경리 출신인 데다 필리핀 근무를 오래한 탓에 사내 기반이 약했다.
전통적으로 도요타에선 생산과 기술파트를 거쳐야 사장에 오를 수 있는 불문율이 있었는데 그의 등용으로 이 규칙은 여지없이 깨졌다.
좌천이나 다름없다는 평을 받았던 필리핀 근무 중 거물급인 리카르도 시베리오를 상대로 거액의 미수채권을 해결해 주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됐다.
오쿠다 회장은 도요타 가문 밖에서 CEO로 올라선 최초의 전문경영인이기도 하다.
도요타를 연구하는 전문가들로부터 '도요타 불패신화'의 기틀을 닦은 역대 2명의 '명 조련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950년 도산 직전의 위기에 몰렸던 도요타를 기사회생시킨 고(故) 이시다 다이조 사장이 초대 조련사였다면 오쿠다 회장은 그 뒤를 잇는 스타다.
오쿠다 회장 이후 하나의 경영용어로 굳어진 '도요타 웨이'(Toyota Way)도 이제 세계 표준이 됐다.
도요타에 대한 연구는 오쿠다에 대한 연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한편 오쿠다 회장은 영화광으로도 유명하고 한류붐을 일으킨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한국 영화는 물론 최지우 등 영화배우,한국 가수들에 대해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많이 알고 있어 그를 만나는 사람을 놀라게 한다.
장규호 한국경제신문 국제부 기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