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한국경제신문의 1년차 기자인 차기현 기자가 최근 발생한 개똥녀 사건이 불러일으킨 몇 가지 문제에 대해 논점을 세워 정리한 글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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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플러스+ ]

-공중과 대중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격권이란 무엇인가

-1인 미디어는 기존 매체와 어떤 차이를 갖나

-개인주의란 무엇인가

-집단주의란 무엇인가

-마녀 사냥은 언제 왜 일어났나



"사람들이 자신의 커먼센스(양식)를 확인하기 위해 부정한 이웃을 불태우는 행사."

미셸 푸코는 '광기의 역사'에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인용,마녀 사냥을 이렇게 정의했다.

2005년 여름,인터넷 천국 대한민국은 이 상식의 제단에 '부정한 이웃'을 적발해 바치는 번제(燔祭)를 지냈다.

공공 도덕률에 대한 시민 사회의 성숙한 비판 의식을 과시하는 것이었을까.

개똥녀! 향기롭지 못한 이름을 달게 된 그녀는 공공장소에서 애완견의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떠났다가 대중의 표적이 되고 말았다.

이 장면을 목격한 네티즌이 그녀의 얼굴이 드러나는 현장 사진을 인터넷에 띄운 시점에서부터 온 나라에 '아니 어떻게 그런 짓을!'이라는 분노가 가득차 오르는 데까지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또 다른 네티즌은 개똥녀로 추정되는 여성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려놓고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강아지와 태연히 돌아다닌다"며 사람들의 공분을 촉구하기도 했다.

법의 잣대로만 따진다면 그녀는 아마도 경범죄 처벌법을 위반했을 테고 따라서 일정한 처벌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법이 아닌 여론에 의해 그녀는 하나의 거대한 감옥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 사건을 둘러싼 장면 장면들은 인터넷의 위력,혹은 대중의 힘을 다시 한번 우리에게 확인시켜 줌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을 문득 깨닫게 해준다.

다수 대중이 특정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단순히 명예훼손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개똥녀가 인터넷에 사진을 올린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면 인격권 초상권 침해를 둘러싼 새로운 논쟁들이 불 붙는다고 보겠다.

문제의 본질은 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 특정 개인을 사적으로 징벌하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근대 법질서는 정당한 절차에 의하지 않고 개인의 자유와 인격을 제한하거나 침해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또 그것을 우리는 개인주의에 입각한 근대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비록 살인범이라 하더라도 법에 의해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고,그를 익명 상태로 보호하는 것이 근대 법치주의의 기본 정신이다.

그녀가 죄(잘못)를 지었으니 우리는 징벌한다는 식의 대중 재판적 상황이 인터넷의 익명성을 이용해 만연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구나 사적 징벌은 당연 금지다.

미국의 한 대학교수는 "한국의 개똥녀 사건은 또 다른 주홍글씨"라고 했다지만 개인의 인격에 부도덕의 낙인(烙印)을 찍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는 일이다.

이번 개똥녀 사건은 인터넷 댓글의 폭력성과 익명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주의를 환기해주고 있다.

인터넷 실명제 반대론자들은 인터넷을 통한 쌍방향 의사소통이 직접 민주주의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준다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이번 사건처럼 수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욕설,인신 공격이 '쓰나미'처럼 개똥녀를 덮쳐올 때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존립할 공간은 없다.

그것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대중 속에 숨어 돌을 던지는 익명의 인간들만 가득한 곳을 '광장'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 않을까.

민주주의는 합리적 개인의 집합인 공중(pubulic)을 전제로 한 것이지 부화뇌동하며 대중(mass) 정서에 휩쓸리는 집단행동(collective behavior)을 정당화하는 제도는 아니다.

어떻든 이번 사건은 분명 충격으로 다가온 새로운 문화 현상의 하나다.

또 하나 생각해볼 점은 소위 '1인 미디어 시대'라는 언명에 대해서다.

폰카를 들고 커뮤니티와 블로그라는 '매체'를 확보한 수백만의 시민들이 이미 출현해 있다.

하나 같이 마음만 먹으면 기존의 언론 매체를 우회해 사실상의 '보도행위'에 동참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이 보도에 따른 책임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이다.

단지 즐겁게 자신의 주변을 찍고,기록하고,또 '퍼뜨린다'.최근에는 이들이 생산해내는 화젯거리만 집중적으로 취재하는 기자가 따로 생겼을 정도다.

이번 개똥녀 사건도 그렇다.

공중도덕을 무시하는 행위를 보고 화가 치밀어올라 어떻게든 이를 고발하겠다는 동기 그 자체는 정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상대방의 인격은 완전히 고려밖이다.

책임도 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기존 제도로서의 언론과 새로운 1인 미디어는 병존 가능할 것인가.

사실 기존의 언론 매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다양한 책임 장치들을 확보하고 있다.

글과 사진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기술과 수단을 확보했다고 해서 섣불리 '1인 미디어 시대'를 논할 수는 없다.

'모든 시민이 기자'라는 구호 아래 익명의 '날 정보'가 망을 타는 것을 방치한다면 제2,제3의 '개똥녀'는 언제라도 나올 수 있다.

내 자신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항변이 봉쇄돼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다.

사적 영역의 개인이 부정되고 대중 앞에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시대가 됐다.

개개인을 지켜보는 수천만의 눈,과연 당신은 떳떳한가.

죄 없는 자여,'개똥녀'에게 돌을 던져라.

차기현 한국경제신문 생활경제부 기자 khcha@hankyung.com


[ 주홍글씨란 ]

나다니엘 호돈이 17세기 중엽 식민지였던 미국 보스턴에서 일어난 간통사건을 다룬 소설.늙은 의사와 결혼한 헤스터 프린이라는 젊은 여성은 먼저 미국으로 건너와 살면서 아서 딤스데일이라는 목사와 간통하게 된다.

헤스터는 간통죄의 벌로 가슴에 붉은 글씨로 쓰여진 A(adultery:간통)라는 글자를 달고 살도록 선고받는다.

어둡고 준엄한 청교도 사회에서 한 개인이 막강한 위력을 갖고 있는 종교와 도덕률로부터 어떤 고통을 받게 되는지를 치밀한 구성으로 다루었던 명작.19세기 미국 문학의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