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사는 1945년 설립돼 여성잡지 '여원'과 '주부생활' 등을 내놓으며 한 시대를 풍미한 출판사다.

"이곳에서 1950년께 중학생용 학습참고서를 준비하면서 책 제목을 공모했습니다.

대부분 '최신XX''모범XX''표준△△' 따위의 한자어 제목이었는데 그 중 '간추린'이란 제목이 눈길을 끌었지요.

당시 이 말은 서울 지역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도 막상 사내 투표를 해 보니 압도적인 표 차이로 책 제목으로 채택됐습니다."

이후 학원사의 '간추린XX' 시리즈가 인기를 끌면서 말 자체도 제법 기세를 올리게 됐다고 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간추리다'란 말은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만 쓰이던 방언에 지나지 않았다.

"이 말이 사전에 오르게 된 것은 1958년에 나온 국어사전에서였습니다.

당시 이 사전의 교정을 내가 맡았지요.

교정을 보면서 '간추리다'란 낱말이 생각나 슬그머니 집어넣었습니다.

교정자로서는 월권행위였지요.

어쨌거나 죽은 말이나 다름없던 이 말이 이후 되살아나 사전마다 올랐고 널리 쓰이게 됐습니다."

2년 전 한 사석에서 일지사(社) 김성재 선생이 회고한 일화다.

한국 출판계의 거목이었던 그는 지난 6월21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간추리다'가 사전에 실려 표준어가 된 과정은 매우 특이하다.

대개의 경우 어떤 말이 단어로 인정받아 사전에 오르게 되기까지는 매우 '험난한' 길을 거친다.

"수많은 말의 생성과 소멸 속에서 어떤 단어가 사전에 오른다는 것은 그 말에 '공인성'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얼마나 오랫동안,지속적으로 널리 사용되는지를 확인한 뒤에야 사전에 올릴 수 있는 거지요.

영국의 옥스퍼드사전 같은 경우는 10년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전 편찬자들은 말을 보수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안상순 금성출판사 사전팀 부장)

호남 방언이던 '뜬금없다'가 1999년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리고서야 비로소 표준어로 인정받게 된 게 대표적인 경우다.

그전까지 신문 방송 등에선 표준어란 굴레에 씌어 '느닷없이'를 대체어로 놓고 쩔쩔매던(?) 시절이 있었다.

'영글다(여물다),후덥지근하다(후텁지근하다),덥수룩하다(텁수룩하다)' 따위 말도 '표준…'에 와서야 단어로서의 지위를 얻었다.

최근엔 새로 생기는 말 가운데 비교적 일찍 사전에 오르는 것도 꽤 있다.

보통 중사전(2500쪽 전후의 휴대용 크기)을 통해 수록되는데,'왕따' 같은 말은 2002년 '뉴에이스 국어사전'에서 올림말로 다뤘다.

'맞짱'을 뜰지,'맞장'을 뜰지 고민되는 사람은 2004년에 나온 '훈민정음 국어사전'을 참고하면 된다.

이 사전에선 '맞짱'을 올림말로 제시했다.

한국경제신문 오피니언부 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