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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글생글 660호 2020년 4월 20일

다시 읽는 명저

[다시 읽는 명저] "청나라 배척하려면 조선의 무딘 습속부터 바꿔야 한다"…공리공론<空理空論> 아닌 실사구시<實事求是>로 부(富)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본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백성들이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이겠는가.”

“이용(利用)이 있은 뒤에야 후생(厚生)이 될 것이요, 후생이 된 뒤에야 정덕(正德)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하면 어찌 덕을 바르게 할 수 있겠는가. 부강한 나라 건설과 백성의 삶 증진에 보탬이 되는 실용을 정치의 중심에 세워야 한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조선 후기 실학파의 거두로 꼽힌다. 그는 정조 4년(1780) 청나라 황제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 일원으로 뽑혀 베이징과 황제의 별궁이 있던 열하를 다녀왔다. 《열하일기(熱河日記)》는 세계적인 제국으로 발전한 청나라를 두 달여간 목격한 뒤 쓴 생생한 기행문이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전하려는 핵심 메시지는 이용후생, 실사구시(實事求是)였다. 주자학에 매몰된 주류 기득권층이 명분에 집착해 백성의 삶을 돌보는 데는 무능하다고 비판하고, 공리공론(空理空論)이 아니라 진정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견문기라는 큰 틀을 지키면서도 그 안에 일기, 수필, 호질·허생전과 같은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담은 독특한 양식의 책이다.

“백성에 도움되면 오랑캐에도 배워야”

당시 조선에선 “청을 정벌하자”는 북벌론이 여전했다. 박지원은 이런 주장을 헛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눈에 비친 청은 조선과 달리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강국으로 부상한 나라였다. 그는 “팽창하고 있는 청나라의 문물을 살펴보고 좋은 점은 받아들여 조선의 것으로 만드는 게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확신했다.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백성에게 이롭고 국가를 부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본받아야 한다. 청과 통상(通商)하면 국내 산업을 촉진하고 문명의 수준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수레 등 유통수단의 발달이 청의 부국을 가져온 주요 요소라고 지적하고, 조선의 현실을 비판했다. “어떤 사람들은 조선에는 산과 계곡이 많아 수레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얼토당토 않은 소리다. 길이 좋지 않고, 수레보다 봇짐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백성들에게 필요한 물품의 원활한 유통이 안 된다. 백성들이 이다지도 가난한 까닭이 대체 무엇 때문이겠는가.”

깨진 기와 조각과 똥거름도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청의 가장 멋진 구경거리는 깨진 기왓장 이용법과 똥거름 무더기다. 기와 조각은 한갓 쓰레기지만 둘씩, 넷씩 잘 포개면 천하의 아름다운 무늬가 나온다. 조선에선 똥을 더럽다고 여기며 농사에 잘 이용하지 않는데, 청에선 금싸라기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다. 이 똥거름 무더기가 천하의 제도를 만드는 힘임을 깨달았다.” 나라의 문물이 발달하게 된 비결은 기와 조각과 똥 같은 하찮은 것이라도 철저히 활용하는 실용정신에 있다고 본 것이다.

길을 가던 농부와도 필담을 나누며 농사방법을 배운 박지원은 귀국해 누에치기, 나무 가꾸기 등을 직접 하며 연구했다. “정치에서 먼저 필요한 것은 덕(德)과 도(道)가 아니라 백성의 삶을 도탑게 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배척하려거든 우선 우리나라의 무딘 습속을 바꾸고, 밭을 갈고 누에 치고, 질그릇 굽는 일부터 장사하는 것까지 배워야 한다. 천하의 도는 현실에, 저 똥덩어리에 있다.”

그의 이용후생 철학은 허생전에도 잘 드러나 있다. “청을 칠 방도를 알려달라”는 어영대장의 요청에 허생은 “말타기, 칼과 창 찌르기, 활 당기기를 익혀야 하거늘 그 넓은 옷소매를 고칠 생각은 않는가”라고 호통쳤다. 허생의 입을 빌려 명분에 매몰된 사대부를 질타한 것이다.

박지원은 사대부들에게 우물 속에 갇혀 있지 말라고 주문했다. 그가 광활한 요동 벌판을 처음 대면했을 때 “훌륭한 울음터로다.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구나”라고 외친 것은 드넓은 세상을 보면서 편견을 떨쳐내라는 뜻이었다. 생전 처음 본 코끼리에 대한 글을 통해서도 마찬가지 주문을 했다. “사람들은 기이한 코끼리 코를 부리로, 어금니를 다리로 착각하기도 한다. 코와 어금니에만 관심을 갖고 전체를 보지 못해 생기는 착각이다. 세상 이치도 마찬가지다. 어찌 내가 아는 이치가 천하에 두루 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수레 활용 등 현장서 ‘실사구시’ 실행

당연한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 기존의 질서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비치면서 거센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박지원을 아끼던 정조는 이를 문제 삼지 않고, 문체를 비판했다. 박지원은 토속적인 속담을 섞어 쓰기도 했고, 하층 사람들과 주고받은 농담을 세세하게 기록하는 등 당시 지식인들이 쓰는 글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문체를 썼다. 이 때문에 《열하일기》는 정조가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박지원은 정조에게 불려가 “다시는 이런 난삽한 문장을 쓰지 않겠다”는 요지의 반성문을 썼고, 《열하일기》는 이후 약 1세기 동안 금서로 묶였다.

박지원은 말년에 안의(경남 함양) 현감이 돼 직접 수레와 수차, 물레방아를 만들어 활용하는 등 현장에서 실사구시 정책을 폈지만, 조선사회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홍영식 한경비즈니스 대기자 y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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